이만(李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B9CCFFFFB1605X0 |
자(字) | 지만(志曼) |
생년 | 1605(선조 38) |
졸년 | 1664(현종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목(李莯)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만(李曼)
1605년(선조 38)∼1664년(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만(志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형조참의 이목(李莯)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박사(博士)에 뽑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형조낭청 겸 기사관(刑曹郞廳兼記事官)을 거쳐 예조좌랑‧정언을 지내고, 지평으로 있을 때 대사간 정온(鄭蘊)을 옹호하다가 체직되었다.
1636년에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적극적인 척화를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이하였으며, 호란 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때 관계를 떠났다.
1639년에 복직하여 헌납‧교리‧수찬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 교리가 되고 정랑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 이듬해에 완원군(完原君)에 봉하여졌다.
1647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의 종용으로 교체되어 대사간이 되었다가,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적폐(積幣)를 시정하고 성지(城池)의 수축과 병졸의 훈련 등으로 국방에 힘썼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병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는 대사헌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 표한선(漂漢船)이 있어 조정에서 이를 청나라로 압송하면서 그 주문(奏文)에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것이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니, 당시의 동래부사였던 조경(趙絅)과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 등이 책임을 졌는데, 그도 영변으로 귀양갔다 곧 풀려나 이듬해에는 황해도관찰사‧강화유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시 완도의 국금지(國禁地)에 설장(設莊)하여 치부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가 1661년(현종 2) 충공도관찰사로 나가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민가를 철훼(撤毁)하였다는 오해로 파직되었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1662년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이듬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일행가운데에 금물도매자(禁物盜買者)가 있다는 탄핵을 받아 정사 정유성(鄭維城)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아산의 촌서(村墅)에서 죽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오래 있는 동안 농사짓는 방법 및 토질을 잘 가려내는 일 등에 일가견이 있었으나, 너무 인색하고 이재(理財)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싫어하였다고 한다.
1627년(인조 5) 박사(博士)에 뽑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형조낭청 겸 기사관(刑曹郞廳兼記事官)을 거쳐 예조좌랑‧정언을 지내고, 지평으로 있을 때 대사간 정온(鄭蘊)을 옹호하다가 체직되었다.
1636년에 부수찬을 거쳐 수찬으로 있을 때 적극적인 척화를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이하였으며, 호란 후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때 관계를 떠났다.
1639년에 복직하여 헌납‧교리‧수찬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은거하였다.
1644년 교리가 되고 정랑을 거쳐 승지가 되었으며,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부임, 이듬해에 완원군(完原君)에 봉하여졌다.
1647년 도승지가 되고 이어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의 종용으로 교체되어 대사간이 되었다가, 1649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가 적폐(積幣)를 시정하고 성지(城池)의 수축과 병졸의 훈련 등으로 국방에 힘썼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병조참판이 되고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는 대사헌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 표한선(漂漢船)이 있어 조정에서 이를 청나라로 압송하면서 그 주문(奏文)에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남방의 수성연졸(修城鍊卒)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이것이 병자호란의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추궁하니, 당시의 동래부사였던 조경(趙絅)과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 등이 책임을 졌는데, 그도 영변으로 귀양갔다 곧 풀려나 이듬해에는 황해도관찰사‧강화유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그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시 완도의 국금지(國禁地)에 설장(設莊)하여 치부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가 1661년(현종 2) 충공도관찰사로 나가 부모의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민가를 철훼(撤毁)하였다는 오해로 파직되었다.
우의정 원두표(元斗杓)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1662년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이듬해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우윤이 되었으나, 일행가운데에 금물도매자(禁物盜買者)가 있다는 탄핵을 받아 정사 정유성(鄭維城)의 강력한 추천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아산의 촌서(村墅)에서 죽었다.
그는 지방관으로 오래 있는 동안 농사짓는 방법 및 토질을 잘 가려내는 일 등에 일가견이 있었으나, 너무 인색하고 이재(理財)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싫어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명 : "만(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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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