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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방(李時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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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명(季明)
호(號)서봉(西峰)
시호(諡號)충정(忠靖)
생년1594(선조 27)
졸년1660(현종 1)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귀(李貴)
저서『서봉일기』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시방(李時昉)
1594년(선조 27)∼1660년(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峰).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1625년(인조 3) 서산군수가 되었다.

그뒤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강화에 피란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경계를 엄히 하였으며, 왕이 도착한 뒤에는 8도의 군량미조달의 중책을 맡았다.

이듬해 광주목사로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하였으며, 1632년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제조가 되었다.

1636년 나주목사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승진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도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안도를 방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양서(兩西)의 백성을 모아 대처하도록 하고 남도민은 군량미조달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호란이 일어날 조짐이 뚜렷해지자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다.

1640년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나아갔고, 다음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

1642년 병으로 직을 그만두었으나 겨울에 광주수어사(廣州守禦使)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본의아닌 일로 파직되었다.

1644년 다시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마침 심기원(沈器遠)의 역변(逆變)이 일어나, 그의 형 이시백과 함께 관계되었다는 흉서사건으로 피해를 당하였다.

1645년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647년에는 병조참판이 되고, 가선대부에 승계(陞階)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공조판서에 올랐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산릉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9년 사은사부사청나라에 들어가 외교적 수완을 발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도록 하였으며, 다시 수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공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가 되어 폐정개혁(弊政改革)에 힘썼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나자 그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재차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다음해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서봉일기』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承政院日記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