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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지(尹履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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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소(仲素)
호(號)추봉(秋峰)
시호(諡號)정효(靖孝)
생년1579(선조 12)
졸년1668(현종 9)
시대조선중기
본관해평(海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방(尹昉)
조부윤두수(尹斗壽)
외조부한의(韓漪)
저서『추봉집』

[상세내용]

윤이지(尹履之)
1579년(선조 12)∼1668년(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峰).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고, 영의정 윤방(尹昉)의 아들이며, 모친은 판관 한의(韓漪)의 딸이다.

1600년(선조 33) 문음(門蔭)으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된 뒤, 양구은산적성통진용안현감을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호조정랑을 거쳐, 사예에 이르렀다.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고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여주목사로 재기용되어 크게 치적을 올리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었다.

1625년(인조 3) 승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오르고, 1627년 전라감사가 되어 문란한 군정(軍政)을 바로잡는 데 공헌하였으며, 이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로서 남한산성을 수비하였다.

1629년 강원감사가 되어서는 도내의 신기전(新起田)을 수괄(搜括)하여 국가재정 확보에 이바지하였으며, 1632년 호조참판이 된 뒤 도승지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부사강화수비를 맡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승지로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어 국가기강 확립책을 건의한 바 있으며, 해창군(海昌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645년 평안감사가 된 뒤 함경감사한성판윤을 거쳐, 1650년(효종 1)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형조판서를 두 차례나 역임한 뒤, 1658년 80세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1668년(현종 9)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판돈녕부사로 죽었다.

저서로는 『추봉집』이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大東野乘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성명 : "윤이지(尹履之)"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9尹新之達城尉徐景霌錦陽尉朴瀰晉安尉柳頔一善尉金克鑌皆以儀賓不敢獻議金瑬張晩吳䎘閠聖徽金玄成金應河李曙尹履之李明漢皆不明言李廷龜以儒䟽中浹賊所引諸宰之語恭竢罪譴不敢獻議於收議也
紀年便攷v21領議政金堉年七十九判府事尹絅年九十二海恩君尹履之年八十判府事趙絅年七一十三判書吳竣年七十二
紀年便攷v22尹履之昉子金尙寯壻宣祖己卯生字仲素號秋峯光海丙辰以縣監登增廣官止判敦寧襲封海恩君入耆社顯宗戊申卒年九十諡靖
紀年便攷v25李慶徽慶徵弟申應矩外孫尹履之孫壻光海丁巳生字君美號春田居士又默好其父贊晝西關按使朴燁來其父命出拜慶徽不可曰按使暴虐殺人云何用拜爲
小華龜鑑v10尹履之字仲素號秋峯稚川昉子判敦休菴金尙寯壻韓明勖字■■號玄圃又栗軒知敦鄭斗源字紫源號壺亭知中好仙術韓汝稷字
江華府先生案善李時白蔭嘉善尹履之文嘉善 南以䧺文資憲張紳蔭嘉善尹履之文嘉善 丁丑▣月 赴任同年八月遞 辛啓榮文嘉善 丁
錦營公案兼巡察使 尹履之 甲子九月通政來乙丑九月箇滿去 官至判敦
郯述v01使右參贊尹履之書狀禮曹正郞南溟翼
朝野輯要(光海君下補遺)補遺 尹履之 字仲素號秋峯稚川昉子判敦休庵金尙寯壻 韓明勖 字
國朝人物志v3字行之號南磵泗川人長欽子庚午進士癸酉文科壯元爲京畿都事監司尹履之心器之方上之大選才學之士以行善薦之官至黃海監司子昌明文科參議人物考
睡翁先生日記n1-2책 受穀恐失其倅曰穀可無也此倅不可失也倅卽 左相之子尹履之也少時與余同門而亂後不得 見者于今三十餘年不意其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