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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일(趙希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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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숙(怡叔)
호(號)죽음(竹陰)
호(號)팔봉(八峰)
생년1575(선조 8)
졸년1638(인조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임천(林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원(趙瑗)
외조부이준민(李俊民)
저서『죽음집』

[상세내용]

조희일(趙希逸)
1575년(선조 8)∼1638년(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

부친은 승지 조원(趙瑗)이며, 모친은 병조판서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부사 조희진(趙希進)은 아우가 된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선조가 그 시권(試券)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일 그의 아들 조석형(趙錫馨)도 진사시에 장원을 함으로써 아버지에 이어 3대가 진사 장원의 가통을 세웠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다시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저작에 제수되고, 이어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는 예조좌랑으로 빈사(儐使) 유근(柳根)을 따라 영접하였는데, 그의 시문을 보고 모두 감탄하였다 한다.

그뒤 시강원설서사간원정언을 거쳐 광해군 즉위 후 시강원사서문학이 되었고, 옥당(玉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간당(奸黨)에 휩쓸리지 않았고, 1613년 허균(許筠)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산(理山: 지금의 평안북도 초산)에 안치되었다가 1619년 허균이 복주된 다음 방면되었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교리부응교에 제수되어 경연관을 겸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로 호종하였다. 광주목사(光州牧使), 예조형조참판, 승문원제조, 경상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모문룡(毛文龍)을 맞기도 하였다. 일찍이 경연에 나가 임금과 대하였을 때 인조는 붕당을 타파할 뜻을 비쳤다.

이때 그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하자, 인조는 불끈 화를 내고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구양수(歐陽脩)의 고사를 들어 군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소인의 무리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을 판단하고 가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삼사(三司)에 출입하면서 상주하는 데 소신을 다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적을 사기도 하였다. 문장과 부시‧서화에 다같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저서에 『죽음집』『경사질의(經史質疑)』 10여책이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槿域書畵徵

[집필자]

홍순만(洪淳晩)
대표명조희일(趙希逸)
희일(希逸)
성명조희일(趙希逸)
이숙(怡叔)
죽음(竹陰), 죽음(竹隂)

명 : "희일(希逸)"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9趙正萬希逸曾孫郡守景望子洪霙孫婿孝宗丙申生字定而號寤齋宋浚吉門人肅宗辛酉進壮己巳中壺遜位以太學生倡卛多士守闕號
野乘v13○二十一日院啓沈光世趙希逸金光煜趙韓安昶俱出賊口而其中光世希逸最為出請命竄黜
文獻攷略v10製呈秋夜聞沽客詠詞詩兩所考官詣闕爭詩賦壯元至日旰不決命入兩試券以趙希逸賦句中寒聲暮緊雪意方豪御批遂以希逸爲壯元
大事編年v10要直名非人之情後輩又曰趙韓兩人皆是前輩婚媾所親故未免辟於親愛不得爲公論也右朴炡者居多臣於兩人之中尤惜希逸文章每與儕友輒言不可久廢雖朴炡亦不敢不以臣言爲是其後朴炡論金慶徵殺人之狀又論趙纘韓落後之罪原其本心俱
大事編年v19相戾亦有是耶時烈之撰新豐碑文有曰尊周大義炳若日星其序李植之文曰義理之精論議之正羽翼斯文裨補世道至其撰希逸碑文則直植曰其辭某文字可見所守之確也噫文字之涉於虜人則初無彼此之殊而或崇獎其大義或待之以醇儒甚至變幻
國朝人物志v2民以女妻之文科歷仕淸顯官至承旨從曺植學植許以嘉士東儒師友錄有三子希哲希逸希進俱有文名著世
國朝人物志v2人承旨瑗子宣祖辛丑進士壯元壬寅文科戊申重試禮曹參判光海己酉明使熊化來希逸與西坰柳根淸陰金尙憲同爲接儐希逸問化曰玉筍峯去老爺家幾何化曰是我家主峯其博學
國朝人物志v3字定而號寤齋林川人希逸曾孫肅宗辛酉進士壯元甲戌更化蔭仕歷忠淸監司刑曹判書嘗請益於同春尤菴文谷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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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