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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호(趙廷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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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보(仁甫)
호(號)남계(南溪)
생년1572(선조 5)
졸년1647(인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배천(白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충(趙冲)

[상세내용]

조정호(趙廷虎)
1572년(선조 5)∼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인보(仁甫), 호는 남계(南溪).

부호군 조충(趙冲)의 아들로,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의 아버지이다.

1590년(선조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으로 나가 우정사무(郵政事務)에 큰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의 간호를 위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승문원저작이 되었다.

이때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조정을 혼탁하게 하였으므로 이를 바로잡도록 상주하였다.

그뒤 성균관전적으로 옮겼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출사할 뜻을 버렸다.

그러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헌부지평으로 발탁되고, 이어 성균관직강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삭출(削黜)당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이듬해 다시 서용되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왕이 남한산성으로 동가(動駕)하자 군사를 이끌고 급히 산성으로 출동, 요새를 점거하고 포를 쏘아 원군이 온 것을 성중에 알렸다.

그가 직접 군사를 독려하고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므로 적병은 감히 그가 포진하고 있는 동쪽으로는 진출할 수가 없었다.

1642년 관직을 버리고 제천으로 돌아가 초야에 은거하였다. 예조판서공조판서첨중추부사대사간 등에 제수, 여러 차례 소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말년에도 이조병조판서에 배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집필자]

홍순만(洪淳晩)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