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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의(李愼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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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칙(景則)
호(號)석탄(石灘)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51(명종 6)
졸년1627(인조 5)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원손(李元孫)
저서『석탄집』

[상세내용]

이신의(李愼儀)
1551년(명종 6)∼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

형조판서 이원손(李元孫)의 아들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이어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달려갔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폭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하여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극간하여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다. 그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일대가 불안하여지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에 올랐다. 이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발병하여 인천에 체류하다가 수원 마정리에서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문봉서원(文峰書院)괴산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