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덕함(金德諴)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B355D568B1562X0
자(字)경화(景和)
호(號)성옹(醒翁)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562(명종 17)
졸년1636(인조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상산(商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홍(金洪)
저서『성옹유고』

[상세내용]

김덕함(金德諴)
1562년(명종 17)∼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

부친은 김홍(金洪)이다.

어릴 때 부모를 잃었으나 스스로 문예에 힘써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다음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이항복(李恒福)의 후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1594년 군공청(軍功廳)이 세워지자 도청(都廳)이 되어 공을 세웠다. 이밖에 예조와 공조의 좌랑비변사낭청호조정랑직강사예 등의 중앙관직과 선천청풍단천성천장단안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광해군군기시정에 이르렀으나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으며, 명천온성사천 등지에 이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집의예조병조형조공조참의승지부제학대사성대사간여주목사춘천부사를 거쳐 1636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왕에게 사치를 경계하고 김공량(金公諒)의 신원을 반대하여 인조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호소사(號召使)로 활약하였으며 청나라에 대한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청백리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천구계서원(龜溪書院), 온성충곡서원(忠谷書院), 배천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문집으로 『성옹유고』가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