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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순(閔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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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초(景初)
호(號)습정(習靜)
생년1519(중종 14)
졸년1591(선조 24)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학자 > 유생
민학수(閔鶴壽)
저서『행촌집』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순(閔純)
1519년(중종 14)∼1591년(선조 2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습정(習靜). 장사랑(將仕郞) 민학수(閔鶴壽)의 아들이다.

어려서는 신광한(申光漢)의 문하에서, 장성한 뒤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경덕으로부터 주정(主靜)의 설(說)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자기가 처하던 재(齋)의 이름을 ‘습정재(習靜齋)’이라 하였다 한다.

1568년(선조 1) 효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학행이 알려져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되고, 이어 공조형조좌랑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갔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1575년 사헌부지평으로 다시 조정에 들었으나,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예관(禮官)들이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상복을 정하자, 그는 송나라 효종(孝宗)의 백모3년(白帽三年)의 고제(古制)로 고쳐 준용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한 것이 물의를 빚어, 그해 6월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야에 묻혔다.

그뒤 용강현령(龍岡縣令)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이르렀으나, 모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는 하였다.

그뒤로는 연안(延安)성천(成川)부사(府使)공조정랑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홍치상(洪致祥)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성화곡서원(花谷書院), 고양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행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萬姓大同譜

[집필자]

한영국(韓榮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