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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언(李直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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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이시언(李時彦)
자(字)군미(君美)
호(號)추천(秋泉)
시호(諡號)정간(貞簡)
생년1545(인종 1)
졸년1628(인조 6)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형(李泂)
5대조이보(李補)
외조부정응운(鄭應雲)

[상세내용]

이직언(李直彦)
1545년(인종 1)∼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시언(李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5대손으로, 부호군 이형(李泂)의 아들이며, 모친은 정응운(鄭應雲)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전적호조좌랑공조정랑지평사성영변판관삼화현령 등을 역임하고, 평산부사로 나갔다가 1589년에 사임하였다.

그뒤 교리상의원정(尙衣院正)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내고 강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뒤에 장령사재감정(司宰監正)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주에 피난가 있자 도보로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국가회복의 방책을 조목조목 진언하였다.

이어 사예헌납장령 등을 거쳐, 해서(海西)에 나가 군량을 조달하고 돌아와 사간이 되었다.

1593년 경상도진휼어사(賑恤御史)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돌아와 「시무팔조(時務八條)」를 올려 강화를 배척하였고, 정철(鄭澈)의 논죄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596년 해주목사에 기용되고, 이어 인천수원 등을 다스리고 다시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01년 승지가 되었다. 같은해 진주부사(陳奏副使)명나라에 가서 군량미 원조를 요청하고 돌아와 구마(廏馬)를 하사받고, 이어 호조참의동부승지부총관 등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뒤 여주목사경주부윤경기도관찰사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도총관 등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 광해군의 형)의 옥사로 사임하였다.

1612년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계축옥사 때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좌참찬이 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우찬성판중추부사판돈녕부사로 임금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성품이 매우 청백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