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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權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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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유(景由)
호(號)쌍취헌(雙翠軒)
시호(諡號)강정(康定)
생년1503(연산군 9)
졸년1578(선조 11)
시대조선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권적(權勣)
순흥안씨(順興安氏)
외조부안탁(安擢)

[상세내용]

권철(權轍)
1503년(연산군 9)∼1578년(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

부친은 강화부사 권적(權勣), 모친은 순흥안씨(順興安氏)안탁(安擢)의 딸이며, 권율(權慄)의 아버지이다.

1528년(중종 23)에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균관을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당시 영의정 김안로(金安老)의 잘못을 직필(直筆)하였다가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그뒤 김안로가 사사되자 복직되어 홍문관저작박사 겸 시강원설서를 거쳐 1539년 수찬으로 승진하였으며, 1547년(명종 2)까지 병조좌랑이조좌랑이조정랑병조정랑형조정랑직강교리지평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550년에 승문원판교를 거쳐 승정원동부승지에 승진하였으며, 3년 뒤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그뒤 1556년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 호남의 신중(新中)에 왜구가 침범하자 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어 변경을 평정하였다.

1558년 명나라책세자사신(冊世子使臣)이 올 때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우찬성을 역임하고, 1565년에는 병조판서 윤원형(尹元衡)이 죄를 얻어 물러나자 우의정이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에는 좌의정, 1571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작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몸가짐이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중망(衆望)이 있었다고 하며, 비록 출중한 재기는 없었으나 청신하게 법을 지켜 감히 허물하지 못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복상(福相)이라고 칭송하였다.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참고문헌]

宣祖修正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범직(李範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