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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金馹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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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운(季雲)
호(號)탁영(濯纓)
호(號)소미산인(少微山人)
시호(諡號)문민(文愍)
생년1464(세조 10)
졸년1498(연산군 4)
시대조선전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맹(金孟)
조부김극일(金克一)
저서『탁영집(濯纓集)』

[상세내용]

김일손(金馹孫)
1464년(세조 10)∼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사헌부집의 김맹(金孟)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뒤 진주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부교리교리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홍문관직제학, 현종도승지, 순조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김극일(金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濯纓集
佔畢齋集
景賢錄
續東文選
朝鮮前期畿湖士林派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The Literati Purges:Political Conflict in Early Yi Korea(Wagner, E. W., Harvard University Press, 1974)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