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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韓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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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유(子柔)
호(號)간이재(簡易齋)
시호(諡號)양절(襄節)
생년1403(태종 3)
졸년1456(세조 2)
시대조선전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영정(韓永矴)
공신호정난공신
공신호좌익공신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확(韓確)
1403년(태종 3)∼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아들이며, 덕종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고,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홍려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자 1429년에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좌찬성이 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죽었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하였지만,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東文選
燃藜室記述
海東名臣傳
大東韻府群玉
國朝人物考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