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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길(呂裕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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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부(德夫)
호(號)춘강(春江)
생년1558(명종 13)
졸년1619(광해군 11)
시대조선중기
본관함양(咸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여순원(呂順元)
증조부여세침(呂世琛)
저서『춘강집』

[상세내용]

여유길(呂裕吉)
1558년(명종 13)∼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부(德夫), 호는 춘강(春江).

첨정 여세침(呂世琛)의 증손이며, 첨지중추부사 여순원(呂順元)의 아들이고, 충청도관찰사 여우길(呂祐吉)의 형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었다. 이어 모친상을 당하여 물러났다가 복을 마치고는 다시 성균관학유학정(學正), 봉상시봉사를 거쳐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자의 탄핵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이어 홍문관박사에서 전적까지 올랐다.

그뒤 사헌부감찰공조좌랑형조좌랑을 거쳐, 외직으로 나아가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황해도도사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달려가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헌납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전운사(轉運使)종사관이 되었다가 중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군량운반의 중임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다가, 가산군수에 임명되어 3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뒤 중앙으로 돌아와 검찰사(檢察使)종사관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1599년 공주목사로 다시 나갔다.

1601년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이후 성균관사예사도시정군기시정사옹원정봉상시정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등을 두루 역임하고, 외직으로 양주목사로 나갔다가 과도한 징세를 하여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외직으로 파주목사밀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군기시정으로 있을 때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결과, 뒤에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추천으로 선조가 특명을 내려 군기시정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때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왕조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국장도감도청(國葬都監都廳)이 되었는데,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하절사(賀節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군수물자를 무역해와서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되어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가 조그만 과실로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동지중추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이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서 외직을 청하여 남양부사로 나갔다.

1618년 병으로 사직하고 양주의 별장에서 지냈다.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장례의 일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였고,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이해에 죽었다.

산수(算數)에 특히 뛰어났고 천문‧역법에도 밝았으며,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였으나 관사를 처리함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또한 절조가 있고 개결(介潔)하여 평생 자신이 한 행동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말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 청렴하여 40여년의 관직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산이 가난한 선비 같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춘강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용조(金容祚)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