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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풍(張志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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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명여(明如)
생년1732(영조 8)
졸년1770(영조 46)
시대조선후기
본관인동(仁同)
활동분야무신 > 무신
장태소(張泰紹)
조부장붕익(張鵬翼)
출생지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도내리
묘소고양군 원당읍 도내리

[관련정보]

[상세내용]

장지풍(張志豊)
1732년(영조 8)∼1770년(영조 46).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명여(明如).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도내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부는 좌찬성 장붕익(張鵬翼)이고, 부친은 통제사 장태소(張泰紹)이다. 형조판서 장지항(張志恒)의 아우이다.

1751년(영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내승을 거쳐 훈련원주부, 선전관을 지냈다. 이듬해 도총부도사경력을 역임하였고, 1753년에 훈련원부정을 거쳐 삭주부사가 되었다. 재임 중 백성들을 괴롭히던 유폐를 모두 개혁하여 징포를 살피니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1756년 진주영장이 되고 그 해 다시 연신의 주청으로 내금위장에 천거되었다. 이어 동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두 번 경패를 어겨 대간의 탄핵으로 통우후에 출포되었고 이듬해 사복장이 되었다. 1758년 우부승지로 예방을 겸하였고 이어서 선전관충청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다음해 승지가 되었고 이해 겨울에 경상도좌병사를 지냈다.

1760년 안면도의 소나무를 마구 베었다는 대신의 주청에 의하여 재임 시 적발치 못하였다 하여 동래로 유배되었으나 곧이어 봉산군수에 제수되었다. 1763년 남방병사를 거쳐 이듬해 우부승지우승지를 지내고 다음해 좌승지금군별장,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766년 대부인의 상을 당하여 사임하였고, 1769년에 복을 마친 후 경주부윤, 경기수사, 우포도대장, 금군별장, 훈련도정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해 겨울에 파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대간이 역사를 아니하고 부임하였다고 탄핵하여 파직당하였다. 1770년에 다시 기용되어 금군별장으로 포도대장부총관을 겸임하였으며 겨울에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영중에서 병사하였다. 묘는 고양군 원당읍 도내리에 있다.

[참고문헌]

京畿人物誌

[집필자]

고윤희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