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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金昌煥){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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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석주(錫柱)
호(號)추당(秋堂)
생년1872(고종 9)
졸년1937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김계현(金啓鉉)
출신지서울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김창환(金昌煥)
1872년(고종 9)∼1937년. 독립운동가. 별명은 김석주(金錫柱), 호는 추당(秋堂). 서울 출신.

김계현(金啓鉉)의 둘째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다.

1899년(광무 3)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5년에는 부위(副尉)로 복무하다가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에 노력하였다.

1909년 12월 일진회가 고종과 통감(統監), 그리고 총리에게 합방상주문(合邦上奏文)과 한일합방청원서(韓日合邦請願書)를 제출하는 등 매국행위를 자행하자, 배동현(裵東鉉)이승규(李昇圭)오상근(吳祥根) 등과 함께 일진회를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여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해외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에서 개척사업을 벌이는 한편, 청년교육을 위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다.

1911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105인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악형을 당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배재학교 등에서 체육을 담당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다가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 무렵 흉년 등으로 동포들이 이산되어 폐교 직전에 이른 신흥학교를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근근히 이어가다가 지청천(池靑天)김광서(金光瑞)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 등을 맞아 이시영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개편하고, 훈련감(訓鍊監)으로 있으면서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시켰다.

1920년 9월 각지의 독립군이 통합되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편성되자 김규식(金奎植)김광서 등과 함께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여단장 지청천과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군대를 이끌고 호림(虎林)에서 이만시(市)로 향하던 중 일본 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두 시간의 혈전을 벌인 끝에 일본 수비대를 궤멸시켜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만시에 도착한 뒤 공산주의자들의 간계를 파악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으나, 독립군은 소련 공산군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당하였다.

1923년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합동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사령장이 되어 대한통의부군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상해의 국민대표자대회에 통의부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30년 항일독립운동 유일당인 한국독립당이 조직되고 그 소속군대인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어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 부사령이 되어 총사령인 지청천을 도와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2년 3월 한국독립군 총사령대리로 추대되었고, 그해 8월에 중국군 고봉림부대(考鳳林部隊)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를 공략하여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1935년에는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이 통합하여 조직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주요간부로서 김규식양기탁(梁起鐸)지청천신익희(申翼熙) 등과 같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현익철(玄益哲)양기탁이복원(李復源) 등과 같이 전당비상대표대회(全黨非常代表大會)를 열어 적색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을 벌여 한국민족혁명당이라고 하였다가, 그뒤 조선혁명당으로 개칭하고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愛國同志援護會, 1956)
韓國獨立運動史 5(國史編纂委員會, 1969)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집필자]

김광남(金光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