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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섭(尹琦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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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윤중규(尹仲珪)
생년1887(고종 24)
졸년1959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경기도 장단

[상세내용]

윤기섭(尹琦燮)
1887년 4월 4일~1959년 2월 27일. 독립운동가‧정치가. 별명은 중규(仲珪).

경기도 장단 출신.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1년에는 간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이광(李光) 등과 군관양성을 위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이후 신흥학교의 교사로 10여년간을 재직하였다.

1920년에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 3월 임시정부의 개조 및 재조직을 주장하는 국민대표회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李承晩)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23년 6월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4년에는 『보병조전(步兵操典)』이라는 군사교육서를 발간하였다. 1926년 김구(金九) 내각에 이규홍(李圭洪)김철(金澈) 등과 입각하여 선전을 책임지고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개헌안 기초위원, 1930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1933년 군무차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아 활약하였다.

한편, 1929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민병길(閔丙吉)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 등과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933년 홍진(洪震) 등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자 김상덕(金尙德) 등과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김두봉(金枓奉)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 민족연합세력 구축에 노력하였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대일투쟁에 전력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김원봉(金元鳳)이 주임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학편찬위원 부주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6년 2월 귀국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당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을 역임하였고,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단의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1946년 12월에 결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국학대학 학장을 역임하였으나, 1950년 6‧25 당시 납북되어 1956년 7월 안재홍(安在鴻)엄항섭(嚴恒燮)오하영(吳夏榮)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반혁명분자혐의로 구속되어 숙청되었다.

[참고문헌]

朝鮮年鑑 1948年版(朝鮮通信社, 1948)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집필자]

김남식(金南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1-16국가보훈처의 확인을 거쳐 생년 1881을 1887. 4. 4 ~ 1959. 2. 27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