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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李範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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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철기(鐵驥)
생년1900(광무 4)
졸년1972
시대항일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이문하(李文夏)
연안이씨(延安李氏)
출신지서울
묘소국립묘지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이범석(李範奭)
1900년∼1972년. 독립운동가‧군인‧정치가.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철기(鐵驥). 서울 출신. 부친은 이문하(李文夏)이며, 모친은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8세 때 김해김씨를 새어머니로 맞이하였다.

1910년 사립 장훈학교(長薰學校)에 들어갔고,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서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杭州體育學校)에서 6개월간 수학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구대장 서가기(徐家驥)가 자기의 기(驥)에 철(鐵)을 덧붙여 ‘철기’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뒤 건해자(乾海子)기병연대 견습사관이 되었으며,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교수부장이 되었다. 같은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을 도와 제2제대(第二梯隊)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이 되었다.

1925년에는 소련합동민족군의 수분지구(綏棼地區)지휘관으로서 소련혁명전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중국항일군의 흑룡강성군(黑龍江省軍)작전과장, 중국군 유럽군사시찰단원을 역임하였고, 1934년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적군관대장(韓籍軍官隊長)을 지냈다.

중국육군 제3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참모(중국군 소장), 중국군 제3집단군 55군 군단참모처장, 1940년에는 중국군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거쳤다. 그리고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년 8월에는 연합군의 자격으로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년 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년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 비정치‧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집권자로부터의 억제와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같은해에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패하였으며, 1953년 이승만(李承晩)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추방당하였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다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의원이 되었으나 같은해 탈당하였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69년 5월 이후에는 국토통일원 최고고문을 지냈으며,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저서로는 회고록인 『방랑의 정열』, 논설집 『민족과 청년』『우둥불』 등이 있다.

[참고문헌]

民族과 靑年(李範奭, 高麗文化社, 1948)
放浪의 情熱(李範奭著, 宋志英譯, 正音社, 1950)
獨裁夢遊病者―族靑의行裝記―(咸土隱, 政經民報社, 1954)
우둥불(李範 奭, 思想社,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5(國家報勳處, 1988)

[집필자]

이정식(李廷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