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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梁起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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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의종(宜鍾)
호(號)우강(雩岡)
생년1871(고종 8)
졸년1938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양시영(梁時英)
인동장씨(仁同張氏)
출신지평안남도 평양
공훈건국훈장 대통령장

[상세내용]

양기탁(梁起鐸)
1871년(고종 8)∼1938년. 독립운동가‧언론인.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1. 가계
양시영(梁時英)의 아들이며, 모친은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儒林)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2. 대한매일신보 발행
1895년(고종 32) 미국인 게일(Gale, J. 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영자전(韓英字典)』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개혁당 조직운동에 가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조선에게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의 운동에 참가하였고, 이 보안회가 해산되자 그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지방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더욱이 그해 7월 18일 영국인 기자 배설(Bethell, E. T., 裵說)과 제휴, 국한문혼용체의 일간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였다. 그때 이 신문의 총무가 된 뒤, 다음해 8월 『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의 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신문의 주필인 그는 일제와 이토(伊藤博文)를 공격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또한 장지연(張志淵)『황성신문』에 쓴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즉각 게재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에 게재, 세계에 알렸다. 당시 다른 신문들이 일제의 「신문지법」에 의한 제약으로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사장이 형식상 외국인이어서 이 법의 저촉대상에서 제외됨을 이용,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결국, 『대한매일신보』를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운동 등 모든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로 발전시켜놓았다. 따라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통감부의 눈의 가시가 되어, 일제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위해 국채보상금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그를 구속하였다.

그러나 사장 배설이 공소사실의 허위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무죄로 출감하였다.
3. 신민회 가담
1908년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회영(李會榮)이동휘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 등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신민회원 800여명의 애국지사는 모두 이념이 투철한 선각자들로서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추진하였다.

1909년 봄 그의 집에서 개최한 신민회 전국간부회의에서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1910년 8월 자신이 직접 그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해 12월 이동녕이회영만주에 보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독립군기지 하나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명근(安明根)에 의한 군자금모금사건이 일어나자 독립군기지창건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11년 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또, 그해 9월에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원 800여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4년간 복역하다가 1915년 2월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규합에 노력하다가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4.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1920년『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유근(柳瑾)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 표면으로는 종교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1년 미국의원단 36명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가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되었다. 이를 이용,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3년 만주에서 편강렬(片康烈)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국내의 일제 중요인물 및 시설을 암살, 파괴하도록 지휘하였다.

또, 1925년 1월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의성단‧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광정단(匡正團)‧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 일제를 공격하게 하였다.

1926년 4월 주진수(朱鎭洙)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 등과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는데 이 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5. 임시정부 주석
1930년상해로 가서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국무령(國務領) 이상룡(李相龍)의 사임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다가 1934년 의정원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 2월 2일 가흥(嘉興)에 국무원이 개설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해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어 의열단‧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등과 이에 가담,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獨立血史 第一‧二卷合本(大韓文化情報社, 1956)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 光復出版社, 1983)
獨立運動大事典(李康勳編著, 大韓民國光復會後援, 1985)
梁起鐸의 民族運動(金必子, 地球文化社, 1988)

[집필자]

신용하(愼鏞廈)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