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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철(玄益哲)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04C775CCA0B1890X0
호(號)묵관(黙觀)
생년1890(고종 27)
졸년1938
시대항일기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평안북도 박천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현익철(玄益哲)
1890년(고종 27)∼1938년. 독립운동가. 호는 묵관(黙觀). 평안북도 박천 출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 재만동포의 자치기관이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1920년 동지들과 관전현 향호구(寬甸縣香沪溝)에서 광한단(光韓團)을 조직, 일제의 주구기관파괴와 밀정숙청에 진력하였다.

1921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복역한 뒤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1924년 통의부(統義府)에 참여하여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길림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였다.

1927년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29년 국민부 내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였으나, 1930년 당간부들이 일본군에 의하여 사살 또는 체포되는 불운이 겹치자 당조직을 개선하고 중앙책임비서가 되어 당업무를 총괄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외교교섭차 봉천(奉天)에 갔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병보석되자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재차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본격적인 대륙침략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3개 단체와 하와이‧멕시코 등지에서 조직된 6개 한인단체와 연관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 항일전선을 재정비하였다.

1938년 일본군의 중국침략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하자 한국광복진선도 충칭으로 옮겨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에 군사학편수위원회(軍事學編修委員會)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지청천(池靑天)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해 5월 창사(長沙)에서 김구(金九)지청천유동열 등과 회합하고 있을 때, 전조선혁명당 간부의 1인으로 일본경찰과 내통하고 있던 이운환(李雲煥)에게 저격당하여 현장에서 죽었다. 이 사건이 독립운동사상 가장 치욕적인 창사사변(長沙事變)이다. 임시정부에서는 수십년간 조국광복을 위하여 헌신 노력한 그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 5(國史編纂委員會, 1969)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 1971)
獨立有功者功勳錄 4(國家報勳處, 1987)

[집필자]

신재홍(申載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