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동삼(金東三)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B3D9C0BCB1878X0
이명(異名)김긍식(金肯植)
호(號)일송(一松)
생년1878(고종 15)
졸년1937
시대조선후기
본관의성(義城)
활동분야호국 > 독립운동가
출신지경상북도 안동
공훈건국훈장대통령장

[상세내용]

김동삼(金東三)
1878년(고종 15)∼1937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성(義城). 원명은 김긍식(金肯植), 호는 일송(一松).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젊은 일꾼의 양성을 위해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독립운동의 기반과 독립투사의 양성책을 협의하였다.

1910년 국권침탈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通化縣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1913년에 여준(呂準)이탁(李沰) 등과 남만주의 동포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민생교육과 군사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같은해에 이탁김창환 등과 유하현(柳河縣)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개설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이상룡이탁남만주 각지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에서 회동하여 부민단을 확대, 개편한 한족회(韓族會)를 발족시켰으며, 그 서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이 되었다.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소속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 속으로 옮겨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했으며, 다시 11월에는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洪範圖)의 군과 합세하여 밀산(密山)러시아 등지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희생을 줄였다.

1922년 연해주(沿海州) 각지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던 끝에,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였으며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23년 북경(北京)에서 열린 국민대표대회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이때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의 대립을 조정하여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일본경찰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1926년에는 두 차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년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金佐鎭)지청천현정경(玄正卿)이규동(李奎東) 등과 두 차례나 삼부통합회의(三府統合會議)를 진행하였다. 그해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의 의장을 맡았으며,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내적인 모순점을 정리하면서 유일당 결성에 주력하였다.

만주사변 때 하얼빈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중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을 한강에 표장(漂葬)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武裝獨立運動秘史(蔡根植, 大韓民國公報處, 1948)
抗日殉國義烈士傳(吳在植, 行政新聞社, 1959)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집필자]

김광남(金光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