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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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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문약(文若)
호(號)계정(桂庭)
시호(諡號)충정(忠正)
생년1861(철종 12)
졸년1905(광무 9)
시대조선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겸호(閔謙鎬)
출신지서울
묘소경기도 용인
공훈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상세내용]

민영환(閔泳煥)
1861년(철종 12)∼1905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서울 출신.

호조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아들이다.
2. 관직과 활동
1881년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개혁으로 인한 구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의 복합으로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내무협판개성유수해방총관(海防總管)친군연해방어사(親軍沿海防禦使)한성우윤(漢城右尹)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호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 1894년 독판내무부사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요동반도(遼東半島)를 점유하고자 하였으나, 러시아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이를 좌절시켜 조선에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는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황제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尹致昊)김득련(金得鍊)김도일(金道一)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上海)나가사키(長崎)동경(東京)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해외파견사절 중 최초로 세계일주를 하였으며,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도중 손병균(孫炳均)김병옥(金秉玉)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귀국 후 마침 발족한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鄭喬)는 지금 정부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韓圭卨)민영환밖에 없므으로 민영환군부대신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참정(議政府參政), 내부대신 겸 군부대신을 지냈으나,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뒤 다시 참정대신탁지부대신에 임명되었고, 그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元帥府)회계국총장(會計局總長)장례원경(掌禮院卿)표훈원총재(表勳院總裁)헌병사령관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대훈위이화장(大勳位李花章)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여 친일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으며, 1905년 참정대신외무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났으며, 순국할 때까지 시종무관으로 있었다.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강탈 같은 사태가 나올 것에 대비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 을사조약체결과 자결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백관들과 연소(聯疏)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헌병에 의하여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으며,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그의 자결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하여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려 나라에서 후하게 예장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의 최고관작이 추증되었으며, 의절의 정문도 세워졌다. 유해는 경기도 용인에 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상은 안국동 로터리에서 와룡동 비원 앞으로 옮겨졌다.

유고 중 대표적인 것으로 『해천추범(海天秋帆)』『사구속초(使歐續草)』『천일책(千一策)』 등이 있고, 그밖에 많은 소(疏)‧차(箚) 등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참고문헌]

閔忠正公遺稿
大韓每日申報
韓國季年史
梅泉野錄
騎驪隨筆
大韓帝國官員履歷書

[집필자]

김성균(金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