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로(李正魯)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815B85CB1838X0 |
자(字) | 대재(大哉) |
호(號) | 사계(沙溪) |
생년 | 1838(헌종 4) |
졸년 | 192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근오(李根五) |
출생지 | 경기도 양평 |
[상세내용]
이정로(李正魯)
1838년(헌종 4)∼1923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대재(大哉), 호는 사계(沙溪). 경기도 양평 출생. 증의정부참정(贈議政府參政) 이근오(李根五)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에 정시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초계문신(抄啓文臣)‧용강현령‧부교리‧정언‧응교를 거쳐, 1863년 철종실록낭청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부호군 및 각 조의 참의를 거쳐 1875년(고종 12)에 경주부윤‧충주목사‧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1882년에는 이조참의로 감생청(减省廳)에 참여하여 관원수의 감축 등을 주장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곧 실각하였다.
1891년에 도승지가 되고 김병시(金炳始) 등의 수구파 정부에서 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1893년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중국의 철도부설,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조판서로 군국기무처에 관여하였다.
1895년 유진만(兪鎭萬)과 함께 복수청(復讐廳)을 설치하고 을미사변 때 폐비에 관계된 자들을 정법(正法)할 것을 상소하였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고, 소두(疏頭)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여섯 차례 올렸다.
1898년 산릉도감제조로 소홀한 능 관리 때문에 철도(鐵島)에 15년간 유배처분을 받았다. 광무‧융희연간에는 중추원1등의관‧봉상사제조‧경효전제조 등 궁내부 각 아문의 장을 지냈다.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858년(철종 9)에 정시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초계문신(抄啓文臣)‧용강현령‧부교리‧정언‧응교를 거쳐, 1863년 철종실록낭청으로 임명되었다.
그뒤 부호군 및 각 조의 참의를 거쳐 1875년(고종 12)에 경주부윤‧충주목사‧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다.
1882년에는 이조참의로 감생청(减省廳)에 참여하여 관원수의 감축 등을 주장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곧 실각하였다.
1891년에 도승지가 되고 김병시(金炳始) 등의 수구파 정부에서 예조판서‧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1893년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중국의 철도부설,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에 대하여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조판서로 군국기무처에 관여하였다.
1895년 유진만(兪鎭萬)과 함께 복수청(復讐廳)을 설치하고 을미사변 때 폐비에 관계된 자들을 정법(正法)할 것을 상소하였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고, 소두(疏頭)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할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여섯 차례 올렸다.
1898년 산릉도감제조로 소홀한 능 관리 때문에 철도(鐵島)에 15년간 유배처분을 받았다. 광무‧융희연간에는 중추원1등의관‧봉상사제조‧경효전제조 등 궁내부 각 아문의 장을 지냈다.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續陰晴史
梅泉野錄
高宗實錄
純宗實錄
承政院日記
續陰晴史
梅泉野錄
[이미지]
[집필자]
장영민(張泳敏)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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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