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시(金炳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BCD1C2DCB1832X0 |
자(字) | 성초(聖初) |
호(號) | 용암(蓉庵) |
생년 | 1832(순조 32) |
졸년 | 1898(광무 2)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안동(安東[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응근(金應根) |
저서 | 『용암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병시(金炳始)
1. 관력
1855년(철종 6) 북원(北苑) 망배례(望拜禮) 때 참반유무시사(參班儒武試射)에서 뽑히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훈국금위종사관(訓局禁衛從事官)‧선전관(宣傳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언(正言)‧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860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오르고 1863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병조참의, 1869년 예조참판‧의금부사(義禁府事), 1870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1874년 도승지(都承旨), 1875년 형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 1876년 도총관‧병조판서, 1877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도통사(都統使), 1878년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이조판서, 1879년 규장각제학‧호조판서, 1881년 공조판서‧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1882년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변리통리내무아문사(辨理統理內務衙門事)‧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 등의 문무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훈국금위종사관(訓局禁衛從事官)‧선전관(宣傳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언(正言)‧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1860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오르고 1863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1865년(고종 2)에는 병조참의, 1869년 예조참판‧의금부사(義禁府事), 1870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 1874년 도승지(都承旨), 1875년 형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 1876년 도총관‧병조판서, 1877년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도통사(都統使), 1878년 총융사(摠戎使)‧어영대장(御營大將)‧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이조판서, 1879년 규장각제학‧호조판서, 1881년 공조판서‧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1882년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변리통리내무아문사(辨理統理內務衙門事)‧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 등의 문무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2. 임오군란시의 활약상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잠시 호조판서를 물러났다가 흥선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된 후 다시 호조판서에 복귀하였고,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군대를 이끌고 인천에 상륙, 주둔하여 군란의 사후처리문제로 조선정부를 괴롭히고 있을 때 지삼군부사로 대관(大官)에 차하되어 종사관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이들과 담판협상하였다.
또, 청나라의 장군 오장경(吳長慶)이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란의 주도세력이었던 군대의 집단거주촌락이 있는 왕십리와 이태원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벌였는데, 이때 청군을 찾아가 무고한 양민은 살육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한다.
임오군란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난후에 다시 부활되었고, 그해 12월에 정부기구가 변경되어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통리아문(統理衙門)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바뀌면서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에 임명되었다.
또, 청나라의 장군 오장경(吳長慶)이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란의 주도세력이었던 군대의 집단거주촌락이 있는 왕십리와 이태원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군인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벌였는데, 이때 청군을 찾아가 무고한 양민은 살육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한다.
임오군란중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난후에 다시 부활되었고, 그해 12월에 정부기구가 변경되어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통리아문(統理衙門)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바뀌면서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에 임명되었다.
3. 갑신정변 이후의 활동과 관력
1883년 1월에는 진주사(陳奏使)로 연행(燕行)했고, 양향당상(糧餉堂上)‧선혜청제조‧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속에서 사대당에 가담하여 김옥균(金玉均)일파의 정변을 깨뜨리고 심순택(沈舜澤)내각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 전권대신이 되어 이탈리아‧영국‧러시아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통리군국아문의 우의정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잇달아 의정부좌의정과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府事)에 제수되었다.
1886년 「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에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증대한 국가경상비의 지출을 억제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근검절약하는 긴축재정으로 당시 정부에서 조운(漕運)의 편리를 위하여 추진하였던 윤선(輪船)의 구입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1888년에는 「논전폐계(論錢弊啓)」에서 정부의 화폐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당오전(當五錢)을 비롯한 악화의 남조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농민전쟁이 터졌는데, 이를 구실로 일본과 청국이 각기 그들의 군대를 아산과 인천에 상륙시켜 청일양국간에 전쟁이 촉발하기 직전인 6월 20일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일본군이 조선정부의 폐정을 개혁한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워 왕궁을 점령하고 24일에 새로이 김홍집(金弘集)내각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4일간의 영의정으로 끝났다. 이리하여 이른바 갑오경장이 진행되고 새로 조직된 군국기무처에서 시강원사(侍講院師)와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의 자리를 맡았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후 김홍집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이를 강제로 실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궁내부특진관으로서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 고종이 아관(俄館)으로 파천하였고 따라서 김홍집이 실각하고 새로이 친로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이때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아래 새 관제를 정비한 광무정부가 발족하자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임명되었고, 대원군이 죽은 뒤 산릉석의중수도감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에 제수되었다.
정치‧경제사상은 철저하게 유교적 왕도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철종조에서 문호개방‧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청일전쟁‧갑오경장‧을미사변 등 한국근세의 역사 속에서 정부의 중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언제나 온건 보수의 길을 선택하여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로 일관하였다.
특히, 김옥균‧박영효(朴泳孝)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혁명세력과는 말할 것도 없고 김홍집‧어윤중(魚允中) 등을 비롯한 온건 개혁세력과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일생을 조선 봉건왕조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5백년 선왕의 제도는 변혁할 수도 없고 변혁해서도 아니된다는 정치원리를 신봉하며, 이를 주장한 수구파 관료였다.
최근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그가 민본주의에 입각한 중도적 개혁가로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계속된 조선근세정치사에서 언제나 민족주의적 입장을 지킨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정치가였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죽음에 국왕이 제문을 친찬(親撰)하고 충문(忠文)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저서로는 『용암집』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속에서 사대당에 가담하여 김옥균(金玉均)일파의 정변을 깨뜨리고 심순택(沈舜澤)내각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 전권대신이 되어 이탈리아‧영국‧러시아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통리군국아문의 우의정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고 잇달아 의정부좌의정과 총리내무부사(總理內務府事)에 제수되었다.
1886년 「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에서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증대한 국가경상비의 지출을 억제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근검절약하는 긴축재정으로 당시 정부에서 조운(漕運)의 편리를 위하여 추진하였던 윤선(輪船)의 구입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1888년에는 「논전폐계(論錢弊啓)」에서 정부의 화폐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당오전(當五錢)을 비롯한 악화의 남조를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농민전쟁이 터졌는데, 이를 구실로 일본과 청국이 각기 그들의 군대를 아산과 인천에 상륙시켜 청일양국간에 전쟁이 촉발하기 직전인 6월 20일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일본군이 조선정부의 폐정을 개혁한다는 이유로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워 왕궁을 점령하고 24일에 새로이 김홍집(金弘集)내각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4일간의 영의정으로 끝났다. 이리하여 이른바 갑오경장이 진행되고 새로 조직된 군국기무처에서 시강원사(侍講院師)와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의 자리를 맡았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 후 김홍집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이를 강제로 실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때 궁내부특진관으로서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 고종이 아관(俄館)으로 파천하였고 따라서 김홍집이 실각하고 새로이 친로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이때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 아래 새 관제를 정비한 광무정부가 발족하자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에 임명되었고, 대원군이 죽은 뒤 산릉석의중수도감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에 제수되었다.
정치‧경제사상은 철저하게 유교적 왕도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이용후생과 경세치용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철종조에서 문호개방‧임오군란‧갑신정변‧갑오농민전쟁‧청일전쟁‧갑오경장‧을미사변 등 한국근세의 역사 속에서 정부의 중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언제나 온건 보수의 길을 선택하여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로 일관하였다.
특히, 김옥균‧박영효(朴泳孝) 등 갑신정변을 주도한 혁명세력과는 말할 것도 없고 김홍집‧어윤중(魚允中) 등을 비롯한 온건 개혁세력과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일생을 조선 봉건왕조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5백년 선왕의 제도는 변혁할 수도 없고 변혁해서도 아니된다는 정치원리를 신봉하며, 이를 주장한 수구파 관료였다.
최근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그가 민본주의에 입각한 중도적 개혁가로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계속된 조선근세정치사에서 언제나 민족주의적 입장을 지킨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정치가였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죽음에 국왕이 제문을 친찬(親撰)하고 충문(忠文)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저서로는 『용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承政院日記
蓉庵集
韓國 近代의 民族意識硏究(金昌洙, 同和出版公社, 1987)
日省錄
承政院日記
蓉庵集
韓國 近代의 民族意識硏究(金昌洙, 同和出版公社, 1987)
[집필자]
성대경(成大慶)
명 : "병시(炳始)"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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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