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묵(閔種黙)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885BB35B1835X0 |
자(字) | 현경(玄卿) |
호(號) | 한산(翰山) |
생년 | 1835(헌종 1) |
졸년 | 1916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명세(閔命世) |
생부 | 민승세(閔承世) |

[상세내용]
민종묵(閔種黙)
1835년(헌종 1)∼1916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 호는 한산(翰山). 민승세(閔承世)의 아들로 민명세(閔命世)에게 입양되었다.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1876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부수찬‧사간원지평(司諫院持平)‧사복시정(司僕寺正)‧승지 등을 지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외무성을 시찰한 다음,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병조참판을 거쳐 임오군란 이후 진하사은 겸 세폐부사(進賀謝恩兼歲幣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의 세관업무를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전이미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에 임용되었으며, 귀국 후 이조참판‧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한성부판윤‧형조판서‧농상사구관(農商司勾管) 등을 지냈다. 같은해 또다시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헌부대사헌에 임용되었다.
갑신정변 직후 청사영접사(淸使迎接使), 1885년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임용되었고, 그해 3월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6년 예조판서와 홍문관제학, 1887년 공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 1888년 형조판서와 홍문관제학 및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1889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었다.
그뒤 3년간 방곡령사건,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의 체결, 제주어채문제(濟州漁採問題) 등 외교 및 통상문제를 해결하였다.
1892년 함경북도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189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896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거쳐 1897년 외부대신‧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탁지부대신,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홍릉제조(洪陵提調)로 임명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조차사건에 대하여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며,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해체시키기 위하여 미국‧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으나 회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뒤 1899년 궁내부특진관‧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내부서리대신‧농상공부서리대신 등을 거쳐, 1910년까지 법부서리대신‧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농부대신‧양지아문총재(量地衙門總裁)‧예식원장(禮式院長)‧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지냈다. 경술국치 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일본외무성시찰기(日本外務省視察記)』 등이 있다.
187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1876년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홍문관부수찬‧사간원지평(司諫院持平)‧사복시정(司僕寺正)‧승지 등을 지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외무성을 시찰한 다음,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립을 계기로 하여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병조참판을 거쳐 임오군란 이후 진하사은 겸 세폐부사(進賀謝恩兼歲幣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의 세관업무를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전이미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에 임용되었으며, 귀국 후 이조참판‧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한성부판윤‧형조판서‧농상사구관(農商司勾管) 등을 지냈다. 같은해 또다시 사은 겸 동지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사헌부대사헌에 임용되었다.
갑신정변 직후 청사영접사(淸使迎接使), 1885년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임용되었고, 그해 3월 진주사(陳奏使)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6년 예조판서와 홍문관제학, 1887년 공조판서와 사헌부대사헌, 1888년 형조판서와 홍문관제학 및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1889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었다.
그뒤 3년간 방곡령사건,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의 체결, 제주어채문제(濟州漁採問題) 등 외교 및 통상문제를 해결하였다.
1892년 함경북도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1894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896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거쳐 1897년 외부대신‧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탁지부대신,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홍릉제조(洪陵提調)로 임명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조차사건에 대하여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며,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해체시키기 위하여 미국‧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으나 회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뒤 1899년 궁내부특진관‧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내부서리대신‧농상공부서리대신 등을 거쳐, 1910년까지 법부서리대신‧천릉도감제조(遷陵都監提調)‧농부대신‧양지아문총재(量地衙門總裁)‧예식원장(禮式院長)‧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등을 지냈다. 경술국치 후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일본각국조약(日本各國條約)』‧『일본외무성시찰기(日本外務省視察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陰晴史
高宗時代史 1∼4(國史編纂委員會, 1970)
紳士遊覽團考(鄭玉子, 歷史學報 27, 1965)
陰晴史
高宗時代史 1∼4(國史編纂委員會, 1970)
紳士遊覽團考(鄭玉子, 歷史學報 27, 1965)
[이미지]
[집필자]
권석봉(權錫奉)
대표명 | 민종묵(閔種黙) |
성명 | 민종묵(閔種默) |
성명 : "민종묵(閔種默)"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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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