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승(李勉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A74C2B9B1766X0 |
자(字) | 계래(季來)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1766(영조 42) |
졸년 | 1835(헌종 1)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성순(李性淳)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면승(李勉昇)
1766년(영조 42)∼1835년(헌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래(季來). 이성순(李性淳)의 아들이며, 판서 이면긍(李勉兢)의 아우이다.
1794년(정조 18)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98년 홍문관에서 처음 벼슬을 한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803년(순조 3) 지평으로서 당시 형옥(刑獄)을 비롯한 행정기강의 해이를 지적하고, 이것이 국체를 손상시키고 백성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 의견이 순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각 부(府)‧조(曹)의 업무수행을 엄격히 하는 조처가 취하여졌다.
1808년 전라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각 지역 수령들의 업무수행상황을 조사, 국가재정의 핵심적 문제였던 환곡‧민고(民庫)‧군정(軍政) 등 지방행정업무의 퇴폐상을 극론하여, 그 결과 전라지역의 환곡에 대한 시정조처가 내려졌다.
그뒤 우부승지로 있다가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부사 박종신(朴宗臣)이 민중에게 구타당하고 부신(符信)마저 빼앗기는 변란이 일어나자, 안핵사(安覈使)로 파견되어 변란의 원인이 전곡(錢穀)의 혹심한 징발 등 부사의 혹정에 있었음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1815년 2월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연안‧토산(兔山) 등지의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상황을 조사하고,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세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1818년 이후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고, 1820년 12월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어 환곡의 불균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고를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825년 사헌‧형조판서를 거쳤고, 같은해 11월 동지사로서 부사 이석우(李錫祐), 서장관 박종학(朴宗學) 등을 대동하고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26년 11월 형조판서에 복직한 뒤 이듬해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29년 경상도관찰사로서 환곡의 수송문제를 다루었다.
그뒤 이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833년 업무처리가 바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뒤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거쳤고, 1834년 순조가 죽자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그 장례를 처리하던 중 지병으로 인하여 이듬해 산릉역소(山陵役所)에서 죽었다.
세역제도(稅役制度)의 문란과 각종 재해로 인하여 민중들이 곤궁을 겪고 있었던 순조시대의 지방실정을 비교적 밝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국가행정과 민중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짓고 있던 세역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노력한 관료였다.
문장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1794년(정조 18)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98년 홍문관에서 처음 벼슬을 한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803년(순조 3) 지평으로서 당시 형옥(刑獄)을 비롯한 행정기강의 해이를 지적하고, 이것이 국체를 손상시키고 백성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 의견이 순조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각 부(府)‧조(曹)의 업무수행을 엄격히 하는 조처가 취하여졌다.
1808년 전라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전라도 각 지역 수령들의 업무수행상황을 조사, 국가재정의 핵심적 문제였던 환곡‧민고(民庫)‧군정(軍政) 등 지방행정업무의 퇴폐상을 극론하여, 그 결과 전라지역의 환곡에 대한 시정조처가 내려졌다.
그뒤 우부승지로 있다가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부사 박종신(朴宗臣)이 민중에게 구타당하고 부신(符信)마저 빼앗기는 변란이 일어나자, 안핵사(安覈使)로 파견되어 변란의 원인이 전곡(錢穀)의 혹심한 징발 등 부사의 혹정에 있었음을 밝히고 민심을 수습하였다.
1815년 2월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연안‧토산(兔山) 등지의 호구(戶口)와 전결(田結)상황을 조사하고, 실정에 맞는 합리적인 세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1818년 이후 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고, 1820년 12월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어 환곡의 불균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고를 시정하려고 노력하였다.
1825년 사헌‧형조판서를 거쳤고, 같은해 11월 동지사로서 부사 이석우(李錫祐), 서장관 박종학(朴宗學) 등을 대동하고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26년 11월 형조판서에 복직한 뒤 이듬해 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29년 경상도관찰사로서 환곡의 수송문제를 다루었다.
그뒤 이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833년 업무처리가 바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공조판서에 기용되었다.
그뒤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거쳤고, 1834년 순조가 죽자 산릉도감제조에 임명되어 그 장례를 처리하던 중 지병으로 인하여 이듬해 산릉역소(山陵役所)에서 죽었다.
세역제도(稅役制度)의 문란과 각종 재해로 인하여 민중들이 곤궁을 겪고 있었던 순조시대의 지방실정을 비교적 밝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국가행정과 민중생활을 기본적으로 규정짓고 있던 세역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노력한 관료였다.
문장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진봉(金鎭鳳)
대표명 | 이면승(李勉昇) |
성명 | 이면승(李勉昇) |
성명 : "이면승(李勉昇)"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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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