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李晩秀)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9CCC218B1752X0 |
자(字) | 성중(成仲) |
호(號) | 극원(屐園) |
시호(諡號) | 문헌(文獻) |
생년 | 1752(영조 28) |
졸년 | 1820(순조 20)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복원(李福源) |
외조부 | 안수곤(安壽坤) |
저서 | 『극옹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만수(李晩秀)
1752년(영조 28)∼1820년(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부친은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며, 모친은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정리자(整理字)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하였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1801년(순조 1) 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유지를 잘못하였다는 죄로 이듬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이 되고,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아갔으나 그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여 정주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저서로는 『극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부친은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며, 모친은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하였으며, 이듬해 정리자(整理字)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하였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진되었다.
1801년(순조 1) 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유지를 잘못하였다는 죄로 이듬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이 되고,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아갔으나 그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에 능하여 정주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저서로는 『극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純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김일기(金馹起)
명 : "만수(晩秀)"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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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