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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찬(金載瓚)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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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보(國寶)
호(號)해석(海石)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746(영조 22)
졸년1827(순조 27)
시대조선후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익(金熤)
저서『해석집』
저서『해석일기』

[상세내용]

김재찬(金載瓚)
1746년(영조 22)∼1827년(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보(國寶), 호는 해석(海石).

부친은 영의정 김익(金熤)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0년(정조 4)에 검열(檢閱)이 되어 『이문원강의(摛文院講義)』를 편집하였고,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다. 이어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고, 검상(檢詳)이조참의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86년에 원춘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울릉도에 잠입, 고기와 향나무를 채취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고, 영동지방 무사들의 시험에서 그들을 삼진(三鎭)에 속하게 하였으며, 봄‧가을로 나눈 시험일을 한날로 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789년에는 홍문관제학대사헌규장각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영의정인 아버지가 사망하여 일시 관직을 떠났다가 1794년에 규장각직제학으로 재임명되었고, 형조판서이조판서예조판서한성부판윤병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96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1799년에 병으로 이조판서를 사임하고, 좌참찬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그해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규장각제학에 임명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에 정조가 승하하자 『건릉표석음기(健陵表石陰記)』를 제술하였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또한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임명되어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802년에 수원부유수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804년에 홍문관제학, 정순왕후(貞純王后)애책문제술관(哀冊文製述官)을 역임하였다.

1805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거절하여 황해도 재령에 부처(付處)되었고, 이듬해 석방되어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807년 우의정에 다시 임명되어 당시 공정함을 잃고 있었던 과거의 폐단을 지적, 시정을 요구하였다.

1808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영남지방의 대동미 3분의 1과 호남지방의 대동미 4분의 1을 아울러 정퇴(停退)하도록 조처하였다.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석집』『해석일기』가 있고, 편서로는 『이문원강의』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