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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존겸(鄭存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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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수(大受)
호(號)양재(陽齋)
호(號)원촌(源村)
시호(諡號)문안(文安)
생년1722(경종 2)
졸년1794(정조 18)
시대조선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문상(鄭文祥)
5대조정치화(鄭致和)

[상세내용]

정존겸(鄭存謙)
1722년(경종 2)∼1794년(정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대수(大受), 호는 양암(陽菴)양재(陽齋)원촌(源村).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8대손으로,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이며, 정문상(鄭文祥)의 아들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754년에는 횡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교리승지 등을 지냈다. 승지로 있을 때 1761년 4월 장헌세자(莊獻世子)영조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영조는 세자의 서유(西遊)에 관여한 심발(沈橃)유한소(兪漢簫)이수득(李秀得) 등을 파면시켰는데 이때 그도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등용되었으나 1772년 당론을 주장하였다 하여 북청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 관계에 복귀, 이조판서를 지냈다.

1775년 홍인한(洪麟漢)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세손을 보호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시파(時派)로서 우의정에 발탁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781년 『영조실록』『경종수정실록』 편찬의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동지사(冬至使)로 부연(赴燕),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다시 우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하였다.

1791년 영의정에 이어 영중추부사로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철저한 시파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日省錄
相臣考略錄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대표명정존겸(鄭存謙)
존겸(存謙)
성명정존겸(鄭存謙)
시호문안(文安)
대수(大受)
양암(陽菴)

명 : "존겸(存謙)"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待闡錄v5存謙欲奏事而相福陽澤力止之云
待闡錄v5陽澤以聯箚之意送錄事言于鄭存謙存謙曰天下萬事皆從首相之言與意而已耶陽澤聞之大懼而悔之
政堂故事v8官金履禧發啓鄭存謙不敎子致與邊景鎭相通事請栫棘敎以近於父子相證不允其後二十一日依啓栫棘其子置之癸巳春存謙蒙放入京命入參進宴
政堂故事v8而大成舊望數十人若是許多而一政三通良可寒心後數日臺諫請存謙命植削黜依啓尋特敎存謙淮陽命植長淵投畀旣而存謙北靑命植鐵山移配命植尋放存謙赴北靑五月十二日臺官金履禧發啓鄭存謙不敎子致與邊景鎭相通事請栫棘敎以近於
政堂故事v8政三通良可寒心後數日臺諫請存謙命植削黜依啓尋特敎存謙淮陽命植長淵投畀旣而存謙北靑命植鐵山移配命植尋放存謙赴北靑五月十二日臺官金履禧發啓鄭存謙不敎子致與邊景鎭相通事請栫棘敎以近於父子相證不允其後二十一日依啓
政堂故事v8之奏語謂吏議望多濫今則皆復爲通淸矣其望焉可如此而大成舊望數十人若是許多而一政三通良可寒心後數日臺諫請存謙命植削黜依啓尋特敎存謙淮陽命植長淵投畀旣而存謙北靑命植鐵山移配命植尋放存謙赴北靑五月十二日臺官金履禧
政堂故事v8皆復爲通淸矣其望焉可如此而大成舊望數十人若是許多而一政三通良可寒心後數日臺諫請存謙命植削黜依啓尋特敎存謙淮陽命植長淵投畀旣而存謙北靑命植鐵山移配命植尋放存謙赴北靑五月十二日臺官金履禧發啓鄭存謙不敎子致與邊
政堂故事v8處之具庠帳前所供沽名釣譽四字公然自吐其涉殊常嚴問草記謂見於鐵嶺亦涉殊常再次嚴問見於北靑存謙配所云初則存謙啓辭渠自爲之彝見其配所初何心論啓再何心彝見況拿命之後其猶尋見以此推之淸類名類時體者類渠何敢掩諱乎當南
政堂故事v11存謙
親鞠日記v12出侤音而已更爲嚴問使卽侤音可也上曰罪人云何在學曰罪人不出一言只是捶頭而已矣弘淳曰罪人氣窒不能言矣尙喆存謙命善曰罪人旣已氣窒姑爲下之以待更推宜矣弘淳曰旣已遲晩則便是結案矣後侤音雖未捧出可卽行刑而今則救療甚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0-06-11현종개수실록 24권, 1671년 5월 13일자 기사를 참고하여 “우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을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의 5대손”으로 고침.
2010-06-16인물사전 정유길 항목을 참고하여 정유길(鄭愉吉)을 정유길(鄭惟吉)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