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적(權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D8CC801FFFFB1675X0 |
자(字) | 경하(景賀) |
호(號) | 남애(南厓) |
호(號) | 계형(繼亨) |
시호(諡號) | 효정(孝貞) |
생년 | 1675(숙종 1) |
졸년 | 1755(영조 31)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안동(安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권수(權燧) |
조부 | 권양(權讓) |
저서 | 『창백헌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권적(權𥛚)
1675년(숙종 1)∼1755년(영조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하(景賀), 호는 창백헌(蒼白軒)‧남애(南厓)‧계형(繼亨).
조부는 사간 권양(權讓)이며, 부친은 승지 권수(權燧)이다.
1710년 생원이 되고, 171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716년 검열이 된 뒤 대교‧봉교‧정언 등을 거쳐 1725년 지평‧사서‧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헌납‧이조좌랑‧부응교를 지내고, 1727년 대사간, 이어 승지가 되어 1732년까지 이 두 직을 번갈아서 역임하다가 1733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1738년 강화유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황선신(黃善身)‧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 3인의 충절이 현저함을 들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1740년 대사헌‧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도승지‧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742년 병조참판이 되어 민정에 관한 단잠팔장(短箴八章)을 올렸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된 뒤, 호조참판‧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745년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대사성을 지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함경도과시관(咸鏡道科試官)으로 나갔으며, 이어서 한성부판윤‧형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를 거쳐 1749년 판의금부사, 1751년 우빈객(右賓客)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1754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계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창백헌집』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조부는 사간 권양(權讓)이며, 부친은 승지 권수(權燧)이다.
1710년 생원이 되고, 171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716년 검열이 된 뒤 대교‧봉교‧정언 등을 거쳐 1725년 지평‧사서‧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교리‧헌납‧이조좌랑‧부응교를 지내고, 1727년 대사간, 이어 승지가 되어 1732년까지 이 두 직을 번갈아서 역임하다가 1733년에 이조참의가 되었다.
1738년 강화유수가 되어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황선신(黃善身)‧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 3인의 충절이 현저함을 들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1740년 대사헌‧예조참판을 역임하고, 이듬해 도승지‧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742년 병조참판이 되어 민정에 관한 단잠팔장(短箴八章)을 올렸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된 뒤, 호조참판‧특진관(特進官)을 역임하고, 1745년 다시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대사성을 지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로서 함경도과시관(咸鏡道科試官)으로 나갔으며, 이어서 한성부판윤‧형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를 거쳐 1749년 판의금부사, 1751년 우빈객(右賓客)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1754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계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창백헌집』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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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