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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팽윤(蔡彭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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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기(仲耆)
호(號)은와(恩窩)
생년1669(현종 10)
졸년1731(영조 7)
시대조선중기
본관평강(平康)
활동분야문신 > 문신
채시상(蔡時祥)
저서『희암집』

[상세내용]

채팽윤(蔡彭胤)
1669년(현종 10)∼1731년(영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중기(仲耆), 호는 희암(希菴)은와(恩窩). 현감 채시상(蔡時祥)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진사가 되고,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낸 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때 숙종의 명에 의하여 오칠언(五七言)‧십운율시(十韻律詩)를 지어 후일 나라를 빛낼 인재라는 찬사와 함께 사온(賜醞)의 영예를 입었다.

그뒤에도 호당(湖堂)에 선임된 자들과 은대(銀臺)에 나아가 시부를 지어 포상을 받았으며, 그가 금중(禁中)에 노닐 때면 언제나 숙종이 보낸 내시가 뒤따라다니며 그가 읊은 시를 몰래 베껴 바로 숙종에게 올리게 하리만큼 시명(詩名)을 날렸다.

1691년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쳐 1694년 정언(正言)에 있으면서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나,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출향(文廟黜享)을 주장한 이현령(李玄齡)의 상소에 참여하였다 하여 삭제되었다.

그뒤 벼슬에서 물러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며 지내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승지에 제수되고, 이듬해 도승지대사간을 거쳐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감시장시관(柑試掌試官)이 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이 전날 양현(兩賢)의 모독과 관계되었다 하여 응거(應擧)를 거부, 교체되는 파란을 겪었으며, 1730년(영조 6) 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고,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해남의 두륜산(頭輪山) 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고,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朝鮮金石總覽
朝鮮寺刹史料

[집필자]

오갑균(吳甲均)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