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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상(朴泰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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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행(士行)
호(號)존성재(存誠齋)
시호(諡號)문효(文孝)
생년1636(인조 14)
졸년1696(숙종 22)
시대조선중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세견(朴世堅)
외조부최곤(崔袞)

[상세내용]

박태상(朴泰尙)
1636년(인조 14)∼1696년(숙종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존성재(存誠齋).

우승지 박세견(朴世堅)의 아들이며, 모친은 판관 최곤(崔袞)의 딸이다.

1654년(효종 5)에 진사가 되고 1671년(현종 12)에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병조좌랑지평교리 등을 거쳐, 북평사(北評事)로 나가 변읍(邊邑)의 병민(兵民)의 숙폐(宿弊)를 시정시켰다.

1674년 이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남인의 득세로 상주목사함경도 암행어사를 거쳐 홍주목사로 나가 진휼에 힘썼으며, 1678년(숙종 4) 군자감(軍資監)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의 실각으로 이조참의형조참의를 이어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붕당조성이 싫어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렸다.

그뒤 호조참의대사성평안도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공평무사한 선정을 베풀었다.

1689년 동지중추부사호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조위사(弔慰使)청나라에 다녀와서 여러 번 병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모시려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다시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吏曹參判兼同知義禁)홍문관제학세자우빈객을 거쳐 양관대제학(兩舘大提學)으로 중궁복위 옥책문(玉冊文)을 찬진하였다.

우참찬 겸 동지경연춘추관을 거쳐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로 서원첩설(書院疊說)의 폐를 지적한 바 있다.

1696년 이조판서로 있다가 지병으로 사직하였다. 인품이 담박, 청수하여 요직을 여러 번 지냈으나 항상 가난하였고, 인재등용에 공도(公道)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출신은 서인에 해당되나 편당(偏黨)을 싫어하여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도 다른 서인들에 비하여 관로(官路)가 무난한 편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