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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유(沈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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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미(仲美)
호(號)오탄(梧灘)
생년1620(광해군 12)
졸년1688(숙종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송(靑松)
활동분야문신 > 문신
심동귀(沈東龜)
외조부김수렴(金守廉)
저서『오탄집』

[상세내용]

심유(沈攸)
1620년(광해군 12)∼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미(仲美), 호는 오탄(梧灘). 응교 심동구(沈東龜)의 아들이며, 모친은 첨지 김수렴(金守廉)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가 되고 1650년(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가 주서를 거쳐 전적병조좌랑용안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에 지평정언장령헌납사간집의 등의 언관을 두루 거쳤고 직강사성사도시정옥천군수사복시정 등을 지낸 뒤 안변부사로 나갔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 仁祖의 繼妃인 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였던 서인(西人)이 실각하여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당하게 되었을 때, 사간으로서 송시열을 변호하는 주장을 폈다가 이듬해초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광주(廣州)에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한 뒤인 1682년에 다시 등용되어 수찬이 되고, 교리응교사인동부승지우승지병조참지예조참의 등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684년에 대사간이 되었고, 그뒤 대사성홍문관부제학을 비롯하여 이조예조호조형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 뒤에 간관들이 소론인 윤증(尹拯)을 구원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고,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 등 노론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저서로는 『오탄집』이 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신해순(申解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