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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명(金佐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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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정(一正)
호(號)귀천(歸川)
시호(諡號)충숙(忠肅)
생년1616(광해군 8)
졸년1671(현종 12)
시대조선중기
본관청풍(淸風)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육(金堉)
저서『귀계유고』

[상세내용]

김좌명(金佐明)
1616년(광해군 8)∼1671년(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계(歸溪) 또는 귀천(歸川).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4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사국(史局)으로 등용된 뒤, 박사설서(說書)를 거쳐 홍문관에 전임되었다.

1646년 병조좌랑이 되어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1648년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안변(安邊)으로 귀양갔으나 그 이듬해 풀려났다.

이조좌랑대사헌경기도관찰사도승지이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현종초에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극력 사양하고, 이때 아버지가 생전에 호남 지방에 실시하게 한 대동법의 시행에 애로가 있음을 한탄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펴기 위하여 호남관찰사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62년(현종 3)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할 때, 현종 즉위초에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의 제안으로 실시되었던 전라도 산군(山郡)의 대동법이 중단된 것을 재차 주창, 시행하게 하였고, 『전라도대동사목(全羅道大同事目)』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과 함께 주관, 강정(講定)하여 그 이듬해에 발표하였다.

1668년 병조판서수어사가 되어 노량의 대열병(大閱兵)에 흩어진 군율을 바로잡았고, 병기‧군량을 충실히 하였다. 한때 호조판서가 되어 크게 국비를 덜어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으며 용모가 단정하였다.

특히, 호조판서가 되자 서리(胥吏)들의 부정이 줄었고, 병조판서가 되니 무사가 경복(敬服)하여 군율이 엄정하였으며, 매사에 과단성이 있고 공정하였다.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백부인데도 조정에서는 믿고 중용하였다.

특히, 아우 김우명(金佑明)이 척족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에 서인(西人)이 낙당(洛黨)과 한당(漢黨)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아버지 묘의 수도사(道事)가 당쟁의 논란이 되었을 때도 별로 휘말리지 않아 명망을 얻었다.

글씨에 능하였는데 도연명체를 본받아 필법에 있어 글씨의 획이 힘찼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귀계유고』가 있다. 글씨로는 고성의 유점사춘파당대사비(楡岾寺春坡堂大師碑), 안동의 권태사묘비(權太師廟碑), 양주의 김식비(金湜碑)가 있으며, 그밖에 김육비(金堉碑)‧이수일비(李守一碑)‧김장생묘표(金長生墓表)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朝鮮金石總覽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