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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복양(趙復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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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초(仲初)
호(號)송곡(松谷)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609(광해군 1)
졸년1671(현종 12)
시대조선중기
본관풍양(豊壤)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익(趙翼)
저서『송곡집』

[상세내용]

조복양(趙復陽)
1609년(광해군 1)∼1671년(현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좌의정 조익(趙翼)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41년 정언으로 있을 때 인조의 아우인 능원대군(綾原大君)집 객청(客廳)의 조급(造給)에 반대하다가 체직되었으나 조석윤(趙錫胤)의 신구(伸救)로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후 헌납교리를 지냈다.

1649년(효종 즉위) 지평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는데, 붕당의 폐를 주장하다가 오히려 원두표(元斗杓)의 당으로 지목되어 왕의 미움을 샀으나 조석윤 등의 신구로 무사하였다.

1651년(효종 2) 그의 아버지 조익이 쓴 윤방(尹昉)의 시장(諡狀)문제로 금부(禁府)에 구수(拘囚)되었으나 곧 풀려났으며, 벼슬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1653년 헌납으로 복직된 뒤, 부교리이조정랑을 역임하고 집의가 되었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으로 사천(史薦)을 마음대로 막았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또다시 조석윤의 파직 환수 주장에 의하여 종성부사로 밀려났다.

그뒤 서원리(徐元履) 등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다시 겸보덕으로 돌아와 집의겸필선사간응교를 역임하였다.

1657년 시강관(侍講官)으로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 고악(古樂)을 본받아 이를 시정할 것을 주장하고, 악장옥책교문(樂章玉冊敎文)을 지었다.

이듬해 응교로서 서필원(徐必遠)의 축창(蓄娼)을 비방하다가 효종의 미움을 샀으나 송준길(宋浚吉)의 신구로 다시 부응교가 된 뒤 1659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적극적인 진휼정책의 이행을 주장하였고, 1660년(현종 1)에는 대사성, 이듬해에는 대사간으로 별도로 설치된 진휼청당상(賑恤廳堂上)이 되어 구황(救荒)에 힘썼다.

그뒤 부제학예조참판병조참판동지성균관사강화유수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성을 지낸 뒤 원자(元子)보양관(輔養官)이 되었다.

1668년에는 예조판서대제학을 겸하여 정시(庭試)를 총괄하였으나, 과거의 시제(試題)가 같은 것을 두번 출제한 실수로 이듬해에 파직되었다가 곧 형조판서로 돌아왔다.

그뒤 우참찬대제학이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광주(廣州)명고서원(明皐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송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차문섭(車文燮)

명 : "복양(復陽)"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28趙持謙復陽子沈光世孫婿仁祖己卯生字光甫號迃齋顯宗癸卯進士庚戌登别試歷翰林南床銓郞舍人肅宗朝選湖堂官止副學三代副
俟百錄v5浚吉進曰士友之論謂宣擧若在朝廷必見嚴憚於君上矣浚吉退而謂判書臣趙復陽曰上未嘗一見尹友而眷重至此者何歟復陽曰上於疏章中固已得其爲人矣由是觀之兩朝之所以禮待宣擧者專以孚誠相感不但聲音笑貌謬爲恭敬而已也今其人已
小華龜鑑v14字光甫號鳩浦復陽子顯宗朝副學
國朝捷錄v01字飛卿號浦渚豊壤人月汀門人治禮學卞完城議己丑拜左文孝公復陽父万源七代祖僉樞瑩中子持謙祖丨丨號迃齋漢弼曾祖
國朝捷錄v01光甫迃齋復陽子享高城寒泉書院翼孫豊陽人
郯述v02復陽翼孫
大事編年v12府使○徐元履充進善素蔑學識進講多錯趙復陽屢摘其謬已而爲臺官言事多迎合復陽又言其不正元履大恨會閔點薦翰復陽以點曾爲醜正之論遏之元履揣上素惡朝臣以同異爲進退遂乘時訴于上上震恐曰趙某敢以私憤阻塞無咎之人特命罷趙
大事編年v12遠護黨命竄三水後改興海趙胤錫鍾城府使○徐元履充進善素蔑學識進講多錯趙復陽屢摘其謬已而爲臺官言事多迎合復陽又言其不正元履大恨會閔點薦翰復陽以點曾爲醜正之論遏之元履揣上素惡朝臣以同異爲進退遂乘時訴于上上震恐曰
國朝人物志v1七代孫復陽撰誌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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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