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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李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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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회(子晦)
호(號)고산(孤山)
호(號)포산(匏山)
생년1600(선조 33)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창정(李昌庭)

[상세내용]

이진(李𥘼)
1600년(선조 3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회(子晦), 호는 고산(孤山)포산(匏山).

이창정(李昌庭)의 아들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7년에 정언이 되었으나, 홍문관에서 양사가 언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하여 대사헌대사간과 함께 체차(遞差)되었다가 다시 정언을 거쳐 지평에 올랐다. 이후 부교리수찬을 지내고,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1643년 8월 청나라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고애사(告哀使)심양에 다녀왔다.

1645년 3도의 조세운송 등을 독촉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각 도에 독운사(督運使)를 파견할 때에 호서어사(湖西御史)에 제수되었고, 이재(吏才)가 있다는 이조의 수망(首望)을 받아 수찬이 되었다.

1649년 사간이 되어 사간원의 다른 관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간원의 탄핵으로 체차되었으나, 다음해 도목정사(都目政事)에 의거하여 충원현감에서 부수찬으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그의 충원현감으로서의 치적과 출대(出代)의 시기가 농번기라는 점 및 한황(旱蝗)이 겹쳤다는 이유를 들어 충원현감에 유임시킬 것을 간청하여 허락되었다.

1654년(효종 5) 교리김홍욱(金弘郁)의 특사를 청하는 상소에서, 왕자로서의 치정(治政) 및 당시의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이조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인척으로서 전형(詮衡)을 좌우하는 폐단을 논하였다. 이후 집의사간부응교세자시강원보덕 등을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회부향미(會簿餉米)를 나누어주었다.

1660년(현종 1) 동부승지병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다음해 예조참의청나라 세조(世祖)의 죽음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의 일원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663년 대사간으로 균역을 위한 양전(量田)의 개선책을 상계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즉, 양전은 지품(地品)을 등급으로 나눔으로써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되, 땅의 비옥도를 살펴 등급을 정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아울러 양전에 있어서 엄격한 등급의 구분보다는 결부(結負)의 증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병조참의호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1667년 도목정사에 의하여 강원감사로 나아갔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國朝榜目
號譜

[집필자]

김춘남(金春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