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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창(鄭百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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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여(德餘)
호(號)현곡(玄谷)
호(號)곡구(谷口)
호(號)대탄자(大灘子)
호(號)천용(天容)
생년1588(선조 21)
졸년1635(인조 13)
시대조선중기
본관진양(晉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효성(鄭孝成)
저서『현곡집』

[상세내용]

정백창(鄭百昌)
1588년(선조 21)∼1635년(인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덕여(德餘), 호는 현곡(玄谷)곡구(谷口)대탄자(大灘子)천용(天容).

공청도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생원‧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주서를 거쳐 검열봉교대교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경망하고 아첨을 잘 한다는 탄핵으로 파직당하였으나, 곧 대교로 복직하여 오랫동안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필(史筆)이 엄정하였으므로 간당(奸黨)의 주목을 받았다.

1613년 광해군이 사관에게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옛일을 조사시킴으로써 모후에 대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이첨(李爾瞻)이 사국(史局)을 위협하여 방석(芳碩)의 처치전말(處置顚末)을 자세히 기록하게 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관련시키려 하자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폐모론이 더욱 심해지자 이이첨 일당에게 몰려 다시 파직되어 경기도 양근(楊根)에 들어가 임숙영(任叔英)이식(李植) 등과 더불어 은둔생활을 보내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사(三士)라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수찬에 등용되어 헌납교리수찬을 거쳐, 1625년(인조 3) 보덕사간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듬해 집의로 문과중시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국구(國舅)인 그의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덕택이라는 비난을 받고 관직에 취임하지 않다가 1627년 동부승지, 다음해 예조참의대사간을 지낸 뒤 1631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해에 이행원(李行遠)의 치죄를 태만하게 한 죄로 다시 파직당하였다가 1632년 대사간에 복직되었으나, 척신(戚臣)이라는 논란으로 취임하지 않았다.

좌부승지부제학을 거쳐 도승지를 지내고, 1634년 경기도관찰사에 재직중 병으로 죽었다. 술을 즐기며 사대부를 업신여겼다 하며, 시문을 잘 하고 청렴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저서로는 『현곡집』 7권 3책이 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志
澤堂集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