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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神德王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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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396(태조 5)
시대조선전기
본관곡산(谷山)
활동분야왕실 > 비빈
강윤성(康允成)

[상세내용]

신덕왕후(神德王后)
미상∼1396년(태조 5).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信川).
1. 가계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가 집권거사에 참여하여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계비가 된 배경에는 신천강씨의 권문세족으로서의 위치가 컸다고 하겠다. 아버지 윤성과 작은아버지 윤충(允忠)윤휘(允暉) 형제들은 충혜왕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서 세도를 떨쳤다.

한편, 윤휘의 아들인 상장군(上將軍) 우(祐)이성계(李成桂)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쌍성만호 자흥(子興)의 사위로서 두 집안은 겹사돈관계에 있었다. 윤충충숙왕의 폐행(嬖幸)이 되어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란(曺頔亂)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윤성충혜왕충목왕 때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또한 윤휘충정왕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장사성군(張士城軍)의 토벌군이 동원된 바 있는데, 이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원나라이부낭중(吏部郞中)의 직위를 가진 이성계의 재종숙 나해(那海)숭문소감(崇文少監)의 직위를 가진 강비의 오빠 순룡(舜龍)이었다.

또한, 부원기(附元期) 때 폐행권신의 일족으로 발호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도 강비의 아우가 된다.
2. 왕비책봉
이와같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비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이때 변고에 대비하여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하여 이천에 있는 한충(韓忠)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되고 사망 후에는 존호를 신덕왕후,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정하였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여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로 하여금 수릉직을 맡게 하였다.

그런 뒤 기제(忌祭)를 맞아 경복궁 내에 강비의 처소를 인안전(仁安殿)으로 정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가 이듬해 9월 정릉에 영각(影閣)을 지어 옮겼다.

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도 참례하였다.
3. 부묘 폐지
태상왕이 사망한 후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 곡에 이장하였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200여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여 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

이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에 반하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宗廟에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김으로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은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4. 부묘 복원
그뒤 현종대에 이르러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비의 부묘문제가 다시 대두하였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이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린 것이다.

이해 9월에는 강비의 기신제를 8월 11일로 고정하여 200여년 만에 복구하게 되었다. 이의 추진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게 되었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소생으로 왕자 방번(芳蕃)방석(芳碩)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太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朝鮮建國의 政治勢力硏究(朴天植, 全北史學 7‧8, 1984‧1985)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능호 : "정릉(貞陵)"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6丁丑六年洪武三十年正月葬貞陵在漢城皇華坊北後移葬神道碑權近撰○招安女眞遣李之蘭按撫皆為編戶○作乕符漢之徵兵始用羽檄後用乕符依此制
紀年便攷v6十八初謚恭順改章憲太祖悼念二殤屡幸僧舍供佛以資冥福太宗追舉恤典世宗以廣平大君璵為后加贈楸城君顯宗朝復貞陵位號後追加大君號
紀年便攷v6己丑九年永樂七年二月移葬貞陵在楊州○賜驪江君閔無咎驪興君閔無疾䓁死仍罷外戚封君無咎䓁興相臣李茂䓁壞亂朝廷政府及三㓛臣啓曰亂臣閔無
紀年便攷v16時中號香湖年十四仲父演教黨於乙巳奸凶累以書諫之親灸於李滉成渾。李珥之門明宗壬子以生員遊太學上䟽請復 貞陵又請各陵立表石以為久遠計以薦入仕歴十官多不就宣祖乙巳以橫城縣監卒年七十四崔慶會慶長弟中宗壬辰生字善遇
紀年便攷v19新門內貞陵洞行宫
紀年便攷v19以永昌為禍根出寘于貞陵洞私家未㡬圍籬安寘于江華文宰一人及禁府堂郞押去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