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경(閔有慶)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BFCC720ACBDB1565X0 |
자(字) | 이길(頤吉) |
호(號) | 풍돈(楓墩) |
호(號) | 도촌(陶村) |
생년 | 1565(명종 20) |
졸년 | 1632(인조 1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여흥(驪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민용(閔溶) |
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조부 | 민기문(閔起文) |
외조부 | 이미수(李眉壽) |
[관련정보]
[상세내용]
민유경(閔有慶)
1565년(명종 20)∼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길(頤吉). 호는 풍돈(楓墩) 또는 도촌(陶村).
관찰사 민기문(閔起文)의 손자로, 생원 민용(閔溶)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실인 이미수(李眉壽)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이제신(李濟臣)에게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가 되고, 이어서 검열‧설서‧대교‧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고 평안도병마평사‧어천역승(魚川驛丞) 등을 거쳐 1600년 홍문록에 오르고, 이듬해 공조정랑‧정언‧헌납‧수찬‧교리를 거쳐 1602년 지평이 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성혼(成渾)의 관작추탈을 상소하자 대사헌 황신(黃愼)과 함께 무고임을 주장하다가 전주판관으로 좌천되고 이어서 파직, 6년 동안 봉산에 유배되었다.
1609년(광해군 1) 개성부경력에 다시 기용되고 필선‧장령을 거쳐, 1613년 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였다.
그뒤 직강‧사예‧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행재소(行在所)에 호종하지 않아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내자시‧내섬사사복시‧예빈시정을 거쳐, 판교‧첨지중추부사‧돈녕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빈궁한 여러 조카들을 잘 교육시켜 그 가운데 민성휘(閔聖徽)는 형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관찰사 민기문(閔起文)의 손자로, 생원 민용(閔溶)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종실인 이미수(李眉壽)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이제신(李濟臣)에게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가 되고, 이어서 검열‧설서‧대교‧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고 평안도병마평사‧어천역승(魚川驛丞) 등을 거쳐 1600년 홍문록에 오르고, 이듬해 공조정랑‧정언‧헌납‧수찬‧교리를 거쳐 1602년 지평이 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성혼(成渾)의 관작추탈을 상소하자 대사헌 황신(黃愼)과 함께 무고임을 주장하다가 전주판관으로 좌천되고 이어서 파직, 6년 동안 봉산에 유배되었다.
1609년(광해군 1) 개성부경력에 다시 기용되고 필선‧장령을 거쳐, 1613년 교리가 되어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였다.
그뒤 직강‧사예‧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행재소(行在所)에 호종하지 않아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내자시‧내섬사사복시‧예빈시정을 거쳐, 판교‧첨지중추부사‧돈녕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빈궁한 여러 조카들을 잘 교육시켜 그 가운데 민성휘(閔聖徽)는 형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성명 : "민유경(閔有慶)"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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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