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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黃愼)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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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숙(思叔)
호(號)추포(秋浦)
시호(諡號)문민(文敏)
생년1562(명종 17)
졸년1617(광해군 9)
시대조선중기
본관창원(昌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황대수(黃大受)
저서『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저서『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
저서『추포집』
저서『대학강어』
공신호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공신호위성공신(衛聖功臣)

[상세내용]

황신(黃愼)
1562년(명종 17)∼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정랑 황대수(黃大受)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뒤 감찰음죽현감을 거쳐, 호조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언이 되어 정여립(鄭汝立)김제군수로 임명한 이산해(李山海)를 추론(追論)하고, 또 정여립의 옥사에 대하여 직언하지 않는 대신을 논박하다가 이듬해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건저(建儲)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였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사서병조좌랑정언이 되고, 다음해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宋經略)을 접반하였다. 『대학강어(大學講語)』를 지어 정주학(程朱學)을 논의하고, 세자(世子: 뒤의 광해군)를 따라 남하하여 체찰사종사관이 되었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596년 변방 백성들의 무완책(撫緩策)을 진달하여 절충장군이 되었으며, 통신사명나라의 사신 양방형(楊邦亨)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에 다녀오고,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승진하였다. 이어 위유사(慰諭使)찬획사(贊畵使)를 거쳐 전라감사가 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남원의 복구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이 되어 인재등용과 기강확립 등을 골자로 하는 12조의 시무차자(時務箚子)를 올리고, 또한 『소학』의 권장을 청하였다.

160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스승인 성혼을 비난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파직당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명나라에 가는 도중 어양(漁陽)에 이르러 정인홍의 탄핵으로 삭탈관작당하였음을 듣고 강화로 돌아갔다.

1605년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1607년 복관(復官)되었으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아 부여에 가서 살았다.

1609년(광해군 1)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陳奏副使)가 되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어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재정의 절용과 민력(民力)을 아낄 것을 주청하였다.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하여졌다.

이듬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공주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추포집』『대학강어』 등이 있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誌狀輯略
明齋遺稿
典故大方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