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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신(南以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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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유(自有)
호(號)직곡(直谷)
생년1562(명종 17)
졸년1608(선조 41)
시대조선중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남호(南琥)

[상세내용]

남이신(南以信)
1562년(명종 17)∼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자유(自有), 호는 직곡(直谷). 참판 남호(南琥)의 아들이고, 이조판서 남이공(南以恭)의 형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3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었으며 주서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예조정랑을 지냈다.

1596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는데, 이때 삼척부사 홍인걸(洪仁傑)이 왜적 포로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있으므로 이를 관찰사에게 압송하려 하였으나, 술에 취한 아우 홍인간(洪仁侃)이 동족을 해친 자들이라 하여 살해하였는데, 마치 공상(功賞)을 탐낸 나머지 참살한 것처럼 무고한 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색낭청(色郞廳)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또한, 행정능력이 없는데다가 아들 혼사에 민간으로부터 재물을 징렴한 덕천군수(德川郡守) 정대길(鄭大吉)과 매사를 하리(下吏)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여 하리들의 조롱을 받고 민간을 침학하여 피해를 입힌 서산군수 박규영(朴葵英)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1597년에는 사헌부지평이 되어 조운(漕運)에 태만한 군자감정(軍資監正) 유사원(柳思援), 사사로운 가정일에 역마(驛馬)를 사용한 통제사종사관(統制使從事官) 윤동로(尹東老)의 파직을 상소하였다. 이어서 장령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 사간이 되었다.

이때 경상도관찰사에 30세의 연소한 이시발(李時發)을 임명하자, 병란으로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왜적과 대치하여 있는 중요한 곳임을 들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바꿀 것을 건의하였다.

1599년 승지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그해 주문사(奏聞使)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양주(楊州)광주(廣州)일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 피해가 크자 이를 포획하지 못한 책임으로 사헌부의 파직탄핵을 받았다.

1601년에 안변부사, 1604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606년에는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1608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