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홍인걸(洪仁傑)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C778AC78B1541X0
자(字)응시(應時)
생년1541(중종 36)
졸년1603(선조 36)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덕렴(洪德濂)

[상세내용]

홍인걸(洪仁傑)
1541년(중종 36)∼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응시(應時). 직장 홍덕렴(洪德濂)의 아들이다.

1568년(선조 1) 진사가 되고, 157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조의 좌랑정랑을 거쳐 해미현감이 되었고, 곧이어 군기시부정을 지내고, 서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회양부사로 발탁되었다. 서천을 떠나려고 할 때 군민들이 유임을 바라면서 길에서 호곡하였다고 한다.

뒤에 오위장이 되어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몽진을 호가(扈駕)하여 서행(西行)하던 도중 형조참의가 되었고, 곧이어 삼척부사가 되었다.

1595년 삼척에 쳐들어온 일본군과 싸워서 잡은 포로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섞여 있었으므로 이들을 관찰사에게 압송하려고 하였으나 술에 취한 그의 아우 인간(仁侃)이 동족을 해친 놈들이라고 격분하고 그 포로들을 형 몰래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죄없는 백성들을 함부로 죽인 것이라고 잘못 보고되었는데,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조사, 보고하도록 본도 감사에게 지시하였으나, 감사는 원래 홍인걸의 명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참혹하게 고문하여 무복(誣服)시켰다.

그때 윤근수(尹根壽) 등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극력 구원하려 하였지만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9년 동안이나 투옥되어 있다가 결국 옥사하였다. 그 원인은 사돈인 정철(鄭澈)이 동인의 배척을 받고 있어 그 화가 그에게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