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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민(尹壽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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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인수(仁叟)
생년1555(명종 10)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길(尹吉)
조부윤봉종(尹奉宗)
증조부윤염(尹{石+廉})
외조부조영조(趙榮祖)
출신지옥당

[상세내용]

윤수민(尹壽民)
1555년(명종 10)∼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수(仁叟). 옥당 출신. 윤염(尹{石+廉})의 증손으로, 조부는 윤봉종(尹奉宗)이고, 부친은 윤길(尹吉)이며, 모친은 조영조(趙榮祖)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1587년(선조 20) 승정원주서 재직 시 병을 핑계로 체직하였으나 사헌부(司憲府)에서 '주서(注書)들이 편하고자 하는 게 습성이 되고 있다'고 아뢰어 파직되었고, 그 뒤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 제수(除授)되었다가 관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산관(罷散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산계(散階)만을 가진 벼슬아치) 상태로 있었기에 편모와 함께 경기 지역으로 피난갔다가 순찰사 권징(權徵)의 막하로 들어가 종군하였다가, 1596년(선조 29) 서흥(瑞興)정평(定平) 부사로 제수(除授)되어 목민 업무를 담당하였다.

1600년(선조 33) 필선우정언장령집의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양주목사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에 진출하였다가, 다시 사간집의를 맡아 전란 중에 왕을 호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동부승지, 이듬해 병조참의로 제수(除授)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오대산을 조사하였다. 1606년(선조 39) 춘천부사가 되었고, 광해군 즉위 후 평안부사예조참의대사간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1617년(광해군 9) 예조참판에 올랐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동조하여 서궁을 유폐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폄손절목』 제정에 간여하였다.

대사성 윤양(尹讓)이 그의 아들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燃黎室記述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