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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정(李光庭){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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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휘(德輝)
호(號)해고(海皐)
생년1552(명종 7)
졸년1629(인조 7)
시대조선중기
본관연안(延安)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주(李澍)
공신호호성공신(扈聖功臣)

[상세내용]

이광정(李光庭)
1552년(명종 7)∼1629년(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

정언 이주(李澍)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승문원정자사관(史官)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정언지제교(知製敎), 예조병조좌랑을 지냈고, 이듬해 환도 후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을 도와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지평병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조예조병조정랑, 동부승지 등을 지낸 뒤 이조예조병조참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사로서 명나라부사였던 심유경(沈惟敬)을 만나러 갔다온 뒤 호조참판이 되어 군향(軍餉)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어서 공조참판을 거쳐 1598년 접반사로서 명나라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을 다녀온 뒤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다.

1599년 호조공조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1602년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고, 주청사(奏請使)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책봉에 대한 고명(誥命)을 받으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계되고, 판돈녕판의금을 거쳐 예조이조판서가 되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뒤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호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그당시의 정치상황이 어지러움을 보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공조형조판서를 거쳐 1626년(인조 4)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때 그곳의 인심이 매우 탐리(貪利)하여 이를 개혁하는 일을 단행하다가 마찰이 생겨 해직당하고, 기로소(耆老所)로 들어갔다. 정묘호란을 당하여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인품이 근검하고 신중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