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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욱(許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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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신(公愼)
호(號)부훤당(負暄堂)
시호(諡號)정목(貞穆)
생년1548(명종 3)
졸년1618(광해군 10)
시대조선중기
본관양천(陽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허응(許凝)
조부허흡(許洽)
증조부허확(許確)

[상세내용]

허욱(許頊)
1548년(명종 3)∼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신(公愼), 호는 부훤당(負暄堂).

증조부는 허확(許確)이며, 조부는 좌참찬(左參贊) 허흡(許洽)(주1)
조부
陽川許氏忠貞公派譜를 참고하여 대사헌 허항(許沆)을 좌참찬 허흡(許洽)으로 수정함. 증조부, 외조부, 처부 추가.
이고, 부친은 허응(許凝)이다. 외조부는 광주안씨(廣州安氏) 안한준(安漢俊)이며, 처부는 전주유씨(全州柳氏) 유녕(柳寧)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현감 때부터 치적을 쌓고 1591년 공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굳게 지켜서 호서호남 지방을 안전하게 하였고, 승장(僧將) 영규(靈圭)를 불러 도내의 승군을 가려뽑게 하여 장수로 삼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서울수복을 위하여 군대를 통진(通津)독산성(禿山城) 등지로 주둔시키다가 도원수 권율(權慄)로부터 내포(內浦)가 풍년임에도 불구하고 군량을 변통치 못한다고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곧 이조의 요청과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형조참의에 임명되고, 청량사(請糧使)명나라에 건너가 산둥지방의 곡식 2만2700섬을 얻어왔다.

그뒤 강계부사로서 여진족의 움직임을 정탐하여 보고하고, 의주부윤평안도관찰사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남은 역대의 실록을 다시 인출(印出)하여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할 때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활약하였다.

그뒤 한성부판윤에 특배(特拜)되었다가 다시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1606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에는 유영경(柳永慶)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고, 이어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에 관련되어 1616년(광해군 8) 원주에 부처(付處)되었으며, 1618년 유배지인 원주에서 죽었다. 인조반정 후에 관작이 복구되었고, 시호는 정목(貞穆)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忠淸道先生案

[집필자]

차용걸(車勇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