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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순(宋應洵)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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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공신(公信)
호(號)춘호(春湖)
생년1547(명종 2)
졸년1611(광해군 3)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기수(宋麒壽)
평강채씨(平康蔡氏)
조부송세충(宋世忠)
증조부송여해(宋汝諧)
처부안언수(安彦銖)
외조부채침(蔡忱)
묘소회덕
묘소식장산(食藏山)

[상세내용]

송응순(宋應洵)
1547년(명종 2)∼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공신(公信), 호는 소옹(簫翁)춘호(春湖).

증조부는 송여해(宋汝諧)이고, 조부는 송세충(宋世忠)이고, 부친은 송기수(宋麒壽)명종(明宗)선조(宣祖)대에 걸쳐 판서(判書)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채침(蔡忱)의 딸인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안언수(安彦銖)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우애도 깊어 큰형 송응개(宋應漑)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당쟁에 휘말려 회령에 유배되자 이를 극진히 돌보았다.

두 형과 달리 뒤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595년(선조 28) 지천현감(鎭川縣監)을 시작으로, 1596년(선조 29) 병신정시문과(丙申庭試文科)에 을과 4등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이어 호조(戶曹)‧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김응남(金應男)종사관(從事官)으로 영남에 내려가 있다가, 그해 겨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도 사헌부, 홍문관, 세자시강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원병을 위한 군향(軍餉) 조달관으로 관서지방에 파견되었으며, 한때는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곧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승진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도시(司䆃寺)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양주목사로 전임되었는데 곧 사임하였다. 그 후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어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쳤고, 54세의 나이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귀국 후 얼마동안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조참의(吏曹參議)를 맡아 일을 보다가 1608년(선조 41)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다.

고향으로 내려 간 뒤, 3년 후인 1611년(광해군 3)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회덕 식장산(食藏山)에 있다.

[참고문헌]

한밭人物誌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