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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맹(具思孟)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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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시(景時)
호(號)팔곡(八谷)
시호(諡號)문의(文懿)
생년1531(중종 26)
졸년1604(선조 37)
시대조선전기
본관능성(綾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구순(具淳)
외조부이징원(李澄源)
공신호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공신호호성(扈聖)
공신호선무(宣武)
공신호정난(靖難)
공훈원종공신

[상세내용]

구사맹(具思孟)
1531년(중종 26)∼1604년(선조 3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부친은 의신군(義信君) 이징원(李澄源)의 사위로 영의정에 추증된 구순(具淳)이며,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이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된 뒤,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1560년 전적이 된 뒤 사간정언을 거쳐 1563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교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지내고, 사인을 거쳐 사재감정으로 재직중, 1567년 명종이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에 재직중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전라도관찰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0년 좌부승지가 되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으로부터 왕자를 호종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1594년 지중추부사, 이듬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역옥(逆獄)에 참국(參鞫)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왕자와 후궁을 시종하여 성천에 피난하였으며, 이어서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1602년 맏아들인 구굉(具宏)이 유배되자 곧 사직하였다. 선조 때 신진사류들의 원로사류에 대한 탄핵이 심하여 대부분의 사류들이 뜻을 굽혔으나 끝내 신진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을 받았다. 왕실과 인척이면서도 청렴결백하고 더욱 근신하여 자제나 노복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죽은 뒤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632년 정원군(定遠君)원종(元宗)으로, 그의 다섯째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됨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