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림(黃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D669B9BCFFFFB1517X0 |
자(字) | 여온(汝溫) |
생년 | 1517(중종 12) |
졸년 | 1591(선조 24)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창원(昌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황순경(黃舜卿) |
조부 | 황준원(黃浚源) |
증조부 | 황징(黃澄) |
외조부 | 조계상(曺繼商)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황림(黃琳)
1517년(중종 12)∼1591년(선조 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여온(汝溫). 황징(黃澄)의 증손으로 조부는 황준원(黃浚源)이고, 부친은 황순경(黃舜卿)이며, 모친은 조계상(曺繼商)의 딸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어, 부경(赴京)하는 통사의 불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공무(公貿)를 금지토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자, 왕이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윤허하였다.
그 해 사헌부지평으로 전임되어, 사헌부의 여러 관원들과 같이 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이구수(李龜壽) 등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간원헌납이 되고, 이후 선공감판관‧병조정랑, 부수찬‧수찬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다가, 다시 장령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의정부사인이 되고,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교리‧군자감정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호조참의와 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로서 계속 임금을 시종하였다.
1573년(선조 6) 나주목사를 거쳐 여주목사로 재임 당시, 지방관 중에서 가장 고을을 잘 다스려 특지로 대사헌에 제수(除授)되었으나, 풍헌(風憲)의 수장으로는 적합치 못하다는 사론으로 탄핵되어 관직이 갈렸다. 1577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75세로 사망하였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예문관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어, 부경(赴京)하는 통사의 불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공무(公貿)를 금지토록 해야 한다고 상소하자, 왕이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윤허하였다.
그 해 사헌부지평으로 전임되어, 사헌부의 여러 관원들과 같이 김홍도(金弘度)‧김계휘(金繼輝)‧이구수(李龜壽) 등의 탐학을 탄핵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간원헌납이 되고, 이후 선공감판관‧병조정랑, 부수찬‧수찬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다가, 다시 장령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의정부사인이 되고,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교리‧군자감정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호조참의와 우부승지‧우승지‧좌승지로서 계속 임금을 시종하였다.
1573년(선조 6) 나주목사를 거쳐 여주목사로 재임 당시, 지방관 중에서 가장 고을을 잘 다스려 특지로 대사헌에 제수(除授)되었으나, 풍헌(風憲)의 수장으로는 적합치 못하다는 사론으로 탄핵되어 관직이 갈렸다. 1577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75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燃藜室記述
宣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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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