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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成洛)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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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신(士伸)
호(號)남애(南崖)
생년1542(중종 37)
졸년1588(선조 21)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성세평(成世平)

[상세내용]

성락(成洛)
1542년(중종 37)∼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신(士伸), 호는 남애(南崖).

감사 성세평(成世平)의 아들이며, 청백리로 뽑힌 성영(成泳)의 친형이다. 이황(李滉)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어릴 때 이미 자력으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경서‧주자서를 탐독할 정도의 높은 자질을 가졌다 한다.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홍문관정자를 거쳐서 청요직인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574년에는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홍문관에서 수찬교리직제학을 지내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 활약하였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요직임명을 반대하다가 탄핵받기도 하였다.

1583년에는 사간원사간으로서 홍여순(洪汝諄)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을 공격하여 승정원승지에 이르렀고 이원익(李元翼)과 동지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므로 편집적 성격이고 인품이 가벼워서 분란을 일으키는 데 과단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해에 서인을 등용한 선조의 시책으로 체직되었다.

1588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인천 신현(新峴)에 장례지냈다. 사환(仕宦) 20년에도 전택(田宅)이 없어서 친우들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를 정도의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有懷堂集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