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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길(鄭惟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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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길원(吉元)
호(號)임당(林塘)
생년1515(중종 10)
졸년1588(선조 21)
시대조선전기
본관동래(東萊)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복겸(鄭福謙)
조부정광필(鄭光弼)
저서『임당유고』

[상세내용]

정유길(鄭惟吉)
1515년(중종 10)∼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길원(吉元), 호는 임당(林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손자로, 강화부사 정복겸(鄭福謙)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김상용(金尙容)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정창연(鄭昌衍)좌의정까지 올랐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정언에 올랐다.

그뒤 공조좌랑이조좌랑중추부도사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그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사헌부집의교리직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부제학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하여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황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진흥시켜야 함을 진언하였고, 이어 이조참판예조참판대사간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찬성 홍섬(洪暹)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이황을 추천하였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얼마 뒤 이조판서에 오르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1567년 진하사명나라에 다녀왔다.

1568년(선조 1)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하였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되었다.

그뒤 우찬성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를 거쳐 1581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그뒤 158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되었다. 충효와 근신을 근본으로 삼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어 포섭력이 강하였으며, 큰 일에는 대의를 가지고 과감하게 이를 처결하였다.

또한, 시문에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하여 임당체(林塘體)라는 평을 받았다. 작품에 「한기비(韓琦碑)」가 있고, 저서로는 『임당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정연모(鄭淵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