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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응운(南應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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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치원(致遠)
호(號)국창(菊窓)
호(號)난재(蘭齋)
호(號)관원(灌園)
생년1509(중종 4)
졸년1587(선조 20)
시대조선전기
본관의령(宜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남세건(南世健)

[상세내용]

남응운(南應雲)
1509년(중종 4)∼1587년(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園).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이며, 부친은 참판 남세건(南世健)이다.

1535년(중종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37년 교서관검열, 이듬해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이때 춘당대의 시예에서 제술로 입격하여 반숙마(半熟馬) 한필을 하사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에 앞장서기도 하였으나 춘추관기사관을 겸하면서 사관직(史官職)을 소홀히 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추고(推考)되었다. 이어 외직인 강계판관이 되었다.

이때 변방의 야인들이 자주 침범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경험하고 뒤에 내직으로 돌아와서 야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다.

1545년(인종 1) 사성으로 참교를 겸직하였고,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6년(명종 1) 장령이 되어 다음해 을사사화 이후에 남아 있던 대윤세력의 근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549년 장령으로서 양사(兩司)의 관원과 함께 이기(李芑)윤인경(尹仁競)정순붕(鄭順朋) 등의 국정 천단을 탄핵하다가 실패하였다. 마침 북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1551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장례원판결사좌부승지우부승지참찬관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 1554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뒤 1557년 형조병조참의, 1559년 우승지함경도병마절도사, 1561년 동지중추부사, 1564년 경기도관찰사, 1565년 경상도관찰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4년(선조 17)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총대(瑞葱臺)의 시예에서 문과‧무과에 모두 합격하기도 하는 등 문무를 겸비하여 남병사(南兵使)를 세번이나 역임하는 등 북방의 전략에 밝았다.

상례에도 밝아서 선조 초년 복상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세종 때 제정한 『오례의(五禮儀)』에 따를 것을 주장하였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특히 전서와 주서에 능하여 많은 비에 전서를 썼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과천의 허엽신도비(許瞱神道碑), 장단에 있는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 등의 전서가 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이태진(李泰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